한양 한복판의 거대한 사찰 원각사(圓覺寺)

원각경 언해본을 통하여 국가와 백성이 보리심을 일으켜 대승의 길에 들기 바라는 세조의 마음이 담겨있다.

한양 한복판에 거대한 사찰을 짓고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을 조선 세조는 왜 지었을까?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불교의 수호 신장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전통 사찰에는 효령대군의 불심과 불사 기록이 많이 전해진다.

효령대군이 양주 회암사에서 승려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며 염불하고 있었다.그 때 번개와 같은 밝은 빛이 대낮처럼 불탑을 비추었다. 오색안개가 서리고 수백매의 사리가 분신하였다. 효령대군이 회암사 동편 언덕에 석종을 세우고 석가의 사리를 안치하고 원각경을 설법하였다. 이때 하늘에서 여래의 모습이 나타나고 신승이 단상으로 내려왔다. 또다시 사리분신이 800매가 출현하였다.  효령대군은 사리를 받들고 자신이 체험한 이적을 세조임금께 보고 하였다. 세조는 신심을 내어 함원전에서 사리를 바치고 왕비와 함께 예불을 올렸다. 또다시 400매의 사리가 분신하였다.

세조는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불경이 팔만사천부이다. 그중 원각경은 구경의 과를 일으킨 본이 된다. 내가 명구를 번역하고 장차 간행하려던 차에 효령대군이 원각경 법회를 개설하여 제불여래가 신통 변화를 나타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탁의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흥복사 옛터를 다시 일으켜 원각사라 이름하고 최상의 법문인 원각경을 모시고자 한다. 불사도감으로 효령대군과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예조판서 원호연, 병조판서 윤자윤, 호조판서 김국광, 중추원부사 김개 등이 임명되었다.

인근의 민가 200여채를 보상해주고 철거하였다. 건축, 기와, 석공, 조각, 회화, 토목, 각 분야 장인이 90명이 선발되었다. 그리고 2100여명의 군사가 공역 현장에 투입되었다. 법당 지붕에 올릴 청기와도 8 만장을 구워 들였다. 유교 국가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불사가 시작되었다. 일부 신하의 반대를 세조는 들은척하지 않았다.




오백년 동안 한양의 랜드마크 자리를 지켜온 장엄하고 화려한 12미터의 십층석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한민국 국보 2호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백탑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가장 화려한 불탑이다. 상륜부가 바닥으로 내려와 있다. 오랜 세월 상륜부가 땅바닥에 내려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였까?  1946년 미군 기중기가 동원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오만근의 동을 녹여 원각사 대종이 만들어졌다. 원각사종은 보신각종으로 불리며 현재 대한민국 보물 2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현재의 보신각종은 1985년에 성덕대왕신종 보다 더 크게 만들어 지금의 장소에 있다.


1465년 세조11년 간경도감에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0권이 훈민정음 언해본으로 간행되었다.  지금 보물 제970호로 지정 되어있다. 원각경 언해본을 통하여 국가와 백성이 보리심을 일으켜 대승의 길에 들기 바라는 세조의 마음이 담겨있다.

마침내 원각사 대도량 낙성식이 열렸다.
원각경언해 1148장을 목판본으로 인경 하여 십층석탑에 봉안하였다.

세조는 사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場)을 베풀고 살인강도 외의 모든 죄인을 사면해 주었다. 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128명의 고승 대덕 들이 원각경을 정음으로 독경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네 가지 꽃비가 내리고 또다시 사리 분신의 이적이 있었다. 하늘에서는 백룡이 꿈틀거리고 두 마리 학이 구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였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원각사 낙성 법요식에 초대받은 김시습이 찬시를 지어 바쳤다. 김시습은 세조가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해서는 분노했지만, 태평성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각사 낙성 찬시를 남겼다.


시가에 버려졌던 절터가 성군의 큰 계획으로 만만년 가게 되었네
솜옷에 둥근 머리 부처님 만나는 날 치건에 도포 입고 요순시대를 송축하네
향연은 어가 따라 너울거리고 서기는 불상을 감싸 면면하구나
일민이 참여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오색구름 꽃 속에 주선함이 즐거워라

원각사 옛터는 파고다공원, 탑골공원으로 불린다. 대한민국 최초로 서양식 정원으로 꾸며졌다.

참고자료/석현장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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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