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허리띠

허리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다. 오늘도 허리춤에 차고 있지만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허리띠

허리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다. 오늘도 허리춤에 차고 있지만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원시인들도 짐승의 가죽이나 풀을 엮어 걸친 것도 끈이 있어야 몸에 지탱할 수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 보다도 훨씬 전인 네안데르탈인부터 의복을 걸쳤다고 하면 실로 그 역사는 10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배가 부른 후에 허리띠를 쳐다보며 조금씩 꾸미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재료가 다양해지고 묶었던 곳을 고리로 바꾸어 편리하게 발전해 나갔다. 끈과 띠의 성격은 끈은 유연한 실로 만들어 매는 사람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이와 반대로 띠는 딱딱한 재료로 만들어 쉽게 변형을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긴 천을 허리에 묶는 경우도 있고, 가죽으로 만들어 교구(버클)를 달아매는 허리띠가 통용되었다.

의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의 경우 금관총 금제 허리띠, 금령총 금제 허리띠처럼 보석과 곱은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위세품으로서의 허리띠를 착용하기도 했다. 한복의 경우 고려 시대까지 허리띠를 일반적으로 매어 왔으며 조선 시대 양반의 복식에도 허리띠가 포함되어 있었다. 왕의 허리띠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귀한 재료와 뛰어난 기술로 만들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삼국시대 신라 마립간의 허리띠는 다양한 물건을 매단 드리개가 돋보인다.


서봉총 허리띠


허리띠 드리게


조선시대 옥대  20세기 초


창령 출토 은허리띠


의성 탑리 허리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은 즉위한 해에 선대 왕으로부터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받아 큰 제사에 항상 맸다고 한다. 이 허리띠는 경주 황룡사 구층탑과 장륙존상과 함께 신라의 세 가지 보물이었다.

고려사에도 보면 고려왕은 옥대를 찼다고 한다.


조선왕의 허리띠는 어진과 문헌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인조 26년(1648)에 군자의 덕을 옥에 견주었기 때문에 옛 임금의 복식은 반드시 옥으로 했다고 한다. 조선왕은 후수를 매단 대대를 차고 그 위에 옥대를 매어 위엄을 과시하였다.

신라의 금, 조선의 옥은 왕의 허리띠에만 쓰일 수 있었다. 왕의 허리띠는 모양과 만드는 법이 모두 다르지만 사용된 재료로 보아 각 시대의 최고 지배자가 지닌 권력과 권위를 보여준다.

신라의 허리띠 드리개 끝마다 상징이 되는 물건을 매달았다. 물고기는 수많은 알을 품고 눈을 뜬 모습으로 보아 다산과 영생, 곱은옥은 생명, 약통은 질병 치료, 농기구인 살포는 농사를 상징한다. 숫돌은 철기를 만들때 사용하는 단야구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향주머니와 족집게, 손칼, 용무늬 장식 등을 매달았다.

신라 허리띠는 가죽과 천으로 띠를 만들고 금과 은을 띠에 붙이는 띠꾸미개 (銙板 과판), 띠의 오른쪽 끝에 붙이는 띠끝장식 (帶端金具 대단금구), 왼쪽 끝에 붙이는 띠고리 (鉸具 교구)를 만들었다. 띠꾸미개는 띠 위에 붙이는 네모 모양 판과 그 아래로 하트모양 장식이 있다. 문양은 용무늬와 세잎무늬 (三葉文 삼엽문)를 맞새김 (透彫 투조)하였다.

백제에는 주인을 알 수 있는 허리띠가 두 벌이 있다.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에서 출토된 허리띠이다. 두 무덤은 모두 왕릉으로 허리띠의 주인은 백제 무령왕과 무왕이다. 무령왕 허리띠는 착정돤 상태로 발견이 되었다. 얇은 원형의 금판으로 띠꾸미개를 장식하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허리띠 가운데 유일하다.

익산 쌍릉 대왕릉에서는 옥으로 만든 타원형의 허리띠 장식이 나왔다. 이는 7세기 중반 중국 당나라의 의복 규정에 따르면 문무관 3급 이상의 최고위 관료나 왕족이 착용했다고 한다. 중국 당서에 보면 백제의 왕은 소매가 큰 자색 도포와 청색 비단바지를 입었으며, 금꽃 장식을 한 검정색 나직관 (烏羅冠 오나관) 장식을 하였고 흰 가죽띠 (素皮帶 소피대)에 검은 가죽신 (烏革履 오혁리)을 신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남자의 외투인 포류에는 허리에 매는 허리띠가 필수이다. 허리띠는 옷을 단정히 하는 구실도 있지만, 장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신분을 구별하는 표식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 엄격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국대전에는 1품에서 3품은 홍조아, 4품에서 9품은 청조아를 띤다라고 규정하였다.

고종때는 당상관의 띠는 홍색과 자색, 당하관의 띠는 청색과 녹색, 유생은 혁대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유물은 매우 다양한 색상의 허리띠들이어서 정확한 실상은 파악할 수 없다.

허리띠에는 넓게 짠 광다회, 좁게 짠 세조대 그리고 각대가 있다. 광다회는 너비 2.5cm 내외로 비단실로 엮어 짠 것으로, 신하들이 왕의 행차를 수행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갈때 입는 융복인 철릭에 주로 하던 띠이다.

세조대는 한자어로 세조아, 사대(絲帶), 조대라고 하며 술띠라고도 한다. 세조대는 비단실로 짠 가는 띠로 평상복에 사용하는데, 중치막. 도포, 두루마기, 답호 등은 웃옷에 주로 띠었다. 광다회와 마찬가지로 관리의 품계에 따라 당상관은 홍색, 분홍색, 자색 같은 홍색 계열을, 당하관은 청색, 녹색을 , 喪中(상중)인 사람은 백색의 세조대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단색으로 된 술띠 이외에도 오색실로 엮어 짠 조대가 있다. 이 오채조의 술띠는 심의(深衣)에 착용하는 대대를 동심결로 묶은 위에 한번 더 묶어 장식을 하는 허리띠이다. 심의는 유학자들이 입는 으뜸 예복인 법복으로, 소색(素色)의 바탕에 검정색 선이 가장자리에 둘린 포의 한 종류이다.

세계적으로 전설의 띠로는 북유럽 신화의 메긴기요르드, 그리스 신화의 캐스토스히마스, 그리고 신라의 천사옥대가 있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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