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지명의 유래 12 -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억새밭을 일구다 금덩이가 나온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지명의 유래 12 -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우리나라 곳곳에는 다양한 이름의 마을들이 있다. 그 마을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서로 다른 도시에 똑같은 동 이름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한 인물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지명을 낳기도 했다.

지명의 유래를 유형별로 나누어 그중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지명들을 살펴보았다.

“부자” 는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
예부터 발복지지(복을 받는 곳)와 금시발복(이번 생에 복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마을 지명 중에는 부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꿈에서 만난 여인이 자기 발을 묻어달라고 하여 시신을 묻고 제사까지 지내준 황씨는 경기도 가평군 이화리에서 황금화로를 얻어 부자가 된다. 스님의 말에 따라 황폐한 억새밭을 일구던 여씨는 금덩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금덩이를 가지지 않고 절에 전해주었고, 여씨가 일군 밭에 사람들이 와서 잘살게 되니 이곳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 보화마을이다. 지나가던 지관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묫자리를 잘 써서 부자가 된 김씨도 있다. 김씨는 울산광역시 남구 흥성구만에 청어떼가 몰려와 구만석 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마음보를 잘 써야 부자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자라도 마음보를 나쁘게 쓰면 망한다는 교훈이 담긴 지명도 있다. 천석 부자였으나 스님에게 시주하지 않고 편하게 돈 벌 궁리만 했던 부자 서천식은 망했고(충북 청주시 사창동 천석골),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밥 차리는 게 힘들었던 박수인의 며느리(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와 홍개(세종시 금남면 홍개터)는 소원대로 손님도 사라지고, 재물도 함께 사라져 집안이 망한다. 이와 반대로 욕심쟁이 부자가 어느 날 깨닫고 돈을 나누어준(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비포)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부란 이웃과 나눌 때 영원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억새밭을 일구다 금덩이가 나온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조선 1700 년대 광주광역시 산수리 마을에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여양진이 살았다. 그는 스님의 권유로 산막동에 이주를 하여 농사를 지었다. 당시 이곳은 억새가 많아 그것을 일일이 베어내고 밭을 일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밭을 일구던 그는 어느 날 땅에서 금덩이를 파냈다. 여양진은 금덩이가 스님의 덕으로 얻은 것이나 부처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전해줄 절을 찾아 떠났다. 이후 여양진이 가꿔놓은 밭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 살았고, 주변 마을에서는 금은보화를 얻은 곳이라 해서 보화촌(寶貨村)이라 불렀다.

1775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 보화촌에서 조금 떨어진 본량면 산수리 마을에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여양진이 살았다. 여양진은 불심이 깊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불경을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느 따듯한 봄날, 여양진이 밭에서 일을 하자니 스님 한 분이 밭 앞을 지나갔다. 처음 뵙는 스님이지만 여양진은 일을 잠시 멈추고 스님을 향해 합장을 했다. 이에 스님도 합장을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가 되어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밭일을 하는데 스님이 바랑에 시주를 받아 돌아가고 있었다. 여양진은 자신도 시주를 하고 싶지만 할 게 없어 죄송하다고 했다. 스님은 괜찮다며 다음에 오겠다 하고 떠났다. 여름이 되어 보리농사를 성실하게 지은 여양진은 보리를 수확했고, 보리쌀 한 자루를 시주하려고 스님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여양진 집을 방문했다. 여양진은 보리쌀을 시주했다. 보리쌀을 받아든 스님이 “혹시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길 의향은 없는지요?”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스님은 얼마 전에 봐둔 곳이 있는데, 여양진이 성실하게 농사를 잘 지으니 거기서 농사를 지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고, 이에 두 사람은 당장 그 땅을 보러 갔다. 그곳이 광산구 산막동이었다. 높지 않은 언덕에 갈대가 넓게 퍼져 있었다.

억새밭을 일구다 금덩이가 나온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그렇게 여양진은 산막동에 정착을 했다. 산막동에서도 여양진은 예전과 다름없이 억새로 우거진 황무지를 일구고 밭으로 만들어 씨앗을 뿌렸다. 억새밭을 농지로 개간하는데 기쁨이 있었다. '내년에는 조금 더 넓게 심어야겠다!’ 하며 억새를 베고 괭이로 밭을 일구던 여양진은 괭이 끝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더 힘껏 괭이질을 했다.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여양진은 돌멩이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헤쳐 주먹 크기의 물건 꺼내 흙을 털자 금덩어리가 보였다. 억새밭에 금덩어리가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양진은 스님이 알려준 땅에서 나온 금덩이니 자기 것이 아니고 부처님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금덩이를 시주하기 위해 절을 찾아 떠났다. 이후 여양진이 가꿔놓은 밭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 와 살았고, 주변 마을에서는 금은보화를 얻은 곳이라 해서 이곳을 보화촌(寶貨村)이라 불렀다. 부처님에 대한 불심과 성실한 노동, 착한 심성이 복을 내린 것이다. 그 복을 자신의 덕으로 받았다고 생각지 않고 다시 부처님의 덕으로 돌리는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양진이 일구어놓은 밭이야말로 금덩이보다 귀한 보물이 아닐까?  참조 이영식 광산문화원 보화마을의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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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