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성동의 유래

인간은 일찍이 7이라는 숫자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

대구 칠성동의 유래

인간은 일찍이 7이라는 숫자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

서양에서도 럭키세븐이 있듯이 동양에서도 칠성은 많은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일곱 개의 별인 북두칠성이 밤하늘을 수놓고 일곱 빛깔이 서로 뽐내는 무지개도 있다. 일곱 명의 선녀가 모여 칠선녀가 되었고 수로왕의 일곱 왕자도 함께 성불하였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칠성바위에 치성을 드리던 오래된 풍속이 있다. 그 먼 옛날 선사시대 때에도 돌을 일곱 개 모아놓고 제례 의식을 행하였다는 것도 짐작이 간다.

오늘은 그 칠성바위를 찾아서 대구 도심을 헤쳐보았다.
대구광역시에서 서문시장에 이어 규모가 2번째로 큰 시장이며, 대구광역시에서 서문시장과 함께 2대 장터를 이루고 있다. 동촌 및 하양 등지에서 사과와 농산물이 많이 집결하여 한때는 동천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1946년에 시장 공영화 정책에 따라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상설시장이 개설되었고, 현재는 칠성시장, 경명시장, 대성시장, 칠성꽃시장, 대구청과시장, 삼성시장, 북문시장, 능금시장, 가구시장 등 여러 개의 시장을 모두 합쳐 흔히 칠성시장이라고 부른다. 대구역과 가까우며 인근 시장으로는 교동과 대구약령시가 있다.

잘 알려있지는 않지만, 대구역 뒤쪽에 가면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칠성바위가 있다.

정확한 명칭은 '대구 칠성동 지석묘'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인데 비교적 큰 바위를 중심으로 방사상(중앙의 한 지점에서 사방으로 바퀴살처럼 죽죽 내뻗친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주로 지석묘의 개석으로서 원래 대구역 서남쪽에 있었는데 1973년 대구시민회관 신축 때 경북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덮개돌 아래에 적석이 있었을 뿐 아무런 시설은 없었다. 그 외 발굴조사에서 별다른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시민회관 남쪽의 화단에 옮겨 보존되었는데, 그 후 1998년에 칠성동으로의 이전 요구가 있었고, 이에 대구광역시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옮기게 되었다.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1795년~1797년)로 재임 중이던 이태영이 꿈속에서 북두칠성이 고인돌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고인돌 덮개돌 위에 각기 일곱 아들의 이름을 음각으로 새겨 놓아 후손의 번영을 기원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이 고인돌을 칠성암으로 부르고 이후에도 토속적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칠성동이라는 마을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칠성동의 기원이 되는 일곱 바위(경상감사 이태영이 자신의 일곱 아들의 이름을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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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