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안녕! 왕실부터 저잣거리까지 놀며 쉬며

인간이 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독서를 한다. 그저 잠만 자는 것이 최고의 휴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게 쉬는 방법은 ‘놀이’에 있다.

잠시만, 안녕! 왕실부터 저잣거리까지 놀며 쉬며

인간이 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독서를 한다. 그저 잠만 자는 것이 최고의 휴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게 쉬는 방법은 ‘놀이’에 있다. 현재로 말하자면 게임이나 스포츠이다. 우리 조상들도 그랬다. 잠시 일상을 떠나 쉬는 데는 놀이만 한 게 없었다.

01.이여성의 격구도 1930년대 제작, ⓒ마사박물관 소장
02.기산풍속화의 종정도놀이 ⓒ숭실대 스왈른본

놀이는 일상적인 생업에서 벗어나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설정해서 이루어지는 비일상적인 행위이다. 또한 비생산적이지만, 우리 놀이는 농경사회에서 생산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정 부분 풍요와 관련짓기도 한다. 무엇보다 놀이는 신분과 성별, 나이 등을 뛰어넘어 자유롭고 평등한 가운데 향유된다. 따라서 놀이판에서는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 우대받는다. 예부터 놀이를 보는 시각은 다양한데, 같은 놀이에서도 인식이 달라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기도 한다. 또한 놀이 방식이나 도구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궁궐부터 저잣거리까지 놀았던 한국의 전통놀이 중에 공치기와 판놀이가 있다.

03.현대의 장치기 재현 ⓒ수원문화원



왕실부터 민간 아이들까지 널리 퍼진 공치기

조선 초기 궁중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타구(打毬)’라는 공치기에 열중했다. 격구가 말 위에서 공을 치는 폴로의 원초적 모습이라면, 타구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지상격구인 셈이다.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기마술을 바탕으로 마상격구를 잘했지만, 지상격구도 즐겼다. 따라서 건국 초기 왕족 및 신하 등과 함께 궁중의 내정(內庭)에서 타구를 즐겼다. 이어 태종과 세종 때에도 역시 타구를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타난다.


『세종실록』(세종 3년 11월 25일)의 기록은 보다 구체적인데, 수원문화원수십 명이 좌우로 나뉘어 승부를 겨루는 놀이 방식이 나와 있다. 이때 공을 치는 채는 두꺼운 대나무이며, 채의 끝은 숟가락 모양에 크기는 손바닥만 하며,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다.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뜨고 두꺼우면 공이 잘 뜨지 않았다. 한 번 쳐서 구멍에 들어가면 2점을 얻으며, 안 들어가면 멈춘 곳에서 두세 번 더 친다. 상대 공과 서로 부딪쳐도 한 번은 허용하지만, 두 번은 안 된다는 규정도 있다. 구멍에 넣은 점수로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 이 놀이는 ‘미니골프’라 할 수도 있다.


궁중의 타구는 조선 초부터 민간에도 퍼졌다. 아이들의 놀이로 사회 풍자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태종 13년 2월 30일에 청계천의 혜정교 근처에서 10세 아이 여러 명이 공에 각각 주상, 효령군, 충녕군, 반인의 이름을 붙여 타구(打球)놀이를 한 것이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곽금이란 아이가 제안하여 아이들이 3일에 걸쳐 공치기를 했는데, 공이 다리 밑으로 빠지자 한 아이가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라고 소리를 쳤다. 이때 마침 지나가던 효령군의 유모가 목격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이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놀이 방식으로 보아 일정한 과녁을 설정하고 타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3일에 걸쳐 이 놀이를 한 점에서 아이들이 평시에 즐겨 했으며, 성인들의 놀이를 흉내 냈을 가능성이 크다.


지상의 공치기는 조선 중후기에 민간에 퍼져 ‘장치기’로 일반화되었다. 10대 초반의 남자 아이들이 산에 나무하러 가서 즉석에서 도구를 만들어 놀이했다. 낫으로 소나무를 잘라서 단단한 옹이 부분은 공을 만들고, 긴 작대기로 채를 만들어 공치기를 했다. 마상격구는 기마술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쉽게 할 수 없어 전승이 극히 제한되었다. 따라서 고려 말까지 무인 중심으로 성행하던 마상격구는 조선시대에 와서 무과시험용이 되었다가, 중기 이후에는 총기의 보급으로 약화되었다. 그 대신 지상격구가 ‘타구’ 또는 ‘장치기’라는 이름의 공치기로 널리 행해졌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궁중부터 민간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치기가 유행했는데, 궁중에서는 미니골프 형태로, 민간에서는 필드하키 형태로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04.남승도놀이 ⓒ국립중앙박물관    05.승경도 ⓒ국립중앙박물관     06.종정도의 윤목 ⓒ국립중앙박물관


윤목을 이용해 상류층부터 민간에까지 널리 퍼진 판놀이

조선시대에는 윤목이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표식에 따라 칸을 이동하며 승부를 겨루는 판놀이도 유행했다. 판놀이는 벼슬이 올라가는 종정도놀이, 멋진 승경지를 유람하는 남승도놀이, 중국 명승지를 구경하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는 상영도놀이, 불도를 닦으며 성불해 가는 성불도놀이 등 다양했다. 종정도(從政圖)놀이는 육각의 윤목을 던져 벼슬이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놀이 형태이다. 정도(政圖), 승정도(陞政圖), 승경도(陞卿圖, 升卿圖), 승관도(陞官圖), 종경도(從卿圖)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조선 초 하륜이 만들어 놀았다는 점에서 고려 말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던지는 윤목(輪木)은 나무를 6면으로 깎아 10cm 정도의 공처럼 만들어 잘 구르도록 했다. 면의 숫자는 초기에 여섯 가지였으나 후대에 네 가지로 줄었으며, 간혹 나무가 아닌 뼈주사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종정도판은 관직을 도표로 그리지만, 일부 칸에는 놀이규칙도 적어 넣었다. 벼슬과 관청의 수는 일정치 않지만 300~400칸이 일반적이다. 판의 사방 주위에 지방 관직을 배치하며, 8도의 감사, 병사(兵士), 수사(水使), 고을 수령 중 대표적인 것만 넣었다. 중앙 관직은 가운데 중앙에 정1품을 배치하고 가장 아래에 종9품을 배치했다. 그리고 외국 사신이나 지방의 어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등특수 벼슬은 좌우 양쪽에 따로 배치했다. 중간에 삭직, 파직, 유배, 금부, 심지어 사약 등도 설정해 긴장감과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이 놀이의 목적은 학문에 힘써 성현의 도를 깨우치도록 일깨우며, 아이들에게는 공부의 의욕을 심어주는 데 있다. 주로 유학자들이 즐겼는데, 성종대의 기록을 보면 대궐에서는 연말에 새해맞이 나례 의식에 이 놀이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임란 직후의 휴전 시기에 짬을 내어 병영에서 이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6세기 호남의 들판에서 몇 사람이 정자에서 이 놀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는 전국에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종정도놀이는 신년맞이 궁례, 전쟁 중 군영 및 민간 양반들의 여가놀이, 아이들의 교육용 놀이로 널리 퍼졌다.


남승도(覽勝圖)놀이는 윤목을 던져 도판에 나타난 전국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는 놀이 방식으로, 종정도와 성불도놀이에 비해 후대인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상영도(觴詠圖)놀이는 남승도놀이와 유사한데 중국 각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시문을 짓고 상으로 술잔을 받는 상류계층의 놀이이다. 남승도가 대체로 우리나라 각 명승지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상영도는 중국의 명승지를 대상으로 하며, 여행이 가능하지 않은 관념 속의 지역도 넣었다. 이들 판놀이는 운 놀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윤목이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눈금에 따라 이동하게 되며, 이에는 일정하게 운이 작용한다. 즉, 누구나 높은 벼슬에 올라가고, 전국을 유람하거나, 성불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참여하며,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 조상들의 놀이 방식을 보면, 타구와 같은 놀이는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동적인 놀이인 반면에 판놀이는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적인 놀이이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 실내의 판놀이가 더 격렬해질 수도 있다. 놀잇감도 타구나 장치기는 야외에서 나무로 제작해서 사용하며, 판놀이는 나무와 종이, 돌로 제작한다. 대체로 놀잇감은 자연이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에 놀이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우리 민족은 놀이의 승패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으며, 놀이가 끝나면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는 놀이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적당한 긴장을 갖고 승부를 겨루며 즐길줄 알았다. 현대의 놀이는 격렬한 승부에 따라 지나친 긴장이 유발되는 비대면 놀이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유쾌한 긴장 속에 서로 즐기는 전통적인 대면 놀이가 더욱 필요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출처 / 정형호(서울시 무형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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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