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사랑한 왕실 사찰 회암사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는 회암사를 각별히 아꼈다. 나옹의 제자 무학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태조도 왕위에서 물러난 후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고 세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13년에 걸쳐 크게 중창을 하였다.

양주 회암사지

회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4년 (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이 인도의 나란다를 본떠 266칸짜리 사찰로 중창했다고 전한다. 우왕 2년(1376)에 나옹이 회암사 주지로 있으면서 다시 중창하였다고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적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는 회암사를 각별히 아꼈다. 나옹의 제자 무학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태조도 왕위에서 물러난 후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고 세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13년에 걸쳐 크게 중창을 하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예종이 1년 2개월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둘째인 자을산군을 성종으로 곧바로 즉위시키고 섭정을 하였다.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 전경과   사리탑, 보물2310호



명종 20년(1565) 불교를 많이 후원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회암사에 주석하던 승려 普雨는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얼마 후 맞아 죽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승려 보우를 총애해서 병조판서 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 후 억불숭유가 드세지고 16세기 후반에는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순조 21년(1821)에 광주에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3화상의 비석과 부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쓰려고 했다. 지관의 말을 듣고 지공의 부도를 헐어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 또한 3화상의 부도 안에 있던 사리함도 훔쳤다. 순조는 이 사건을 알고 이응준을 유배 보냈다. 무학의 부도는 그 전에 이미 도굴꾼에 의해 파손이 되었다. 또 나옹의 선각왕사비는 1997년 3월 산불로 인해 완전 훼손되어 복원하였다.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와 부도를 세웠다.

회암사 터는 천보산 기슭에 약간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1964년에 사적 128호로 지정된 회암사지는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0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권역을 발굴, 조사하고있다.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 모양 부지를 8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돌을 쌓아 만든 수로가 절을 둘러싸고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구성은 고려시대의 건축지에서 자주 나타난다. 건물배치는 경복궁과 같은 궁궐과 비슷하다. 남문과 중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보광전과 그 뒤로 몰려있는 주요 건물의 배치가 그러하다. 보광전 주변에는 박석이 깔려있고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청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지공선사부도및석등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는 인도의 승려로 서천국제납박타존자지공대화상이다. 마가다국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나란다 율현에서 출가하였다. 19세 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에게 의발을 전해받고 중국으로 왔다.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는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에 도착하였다. 나옹에게 천축의 나란다와 그 지세가 같다고 말하여 회암사의 중창 동기를 제시하였다. 원나라로 돌아가서 대부대감 찰한첩목아의 부인인 고려인 김씨가 세운 법원사에서 입적하였다. 1370년 서도 달예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 그리고 1372년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다. 박타존자 부도명은 이색이 지어서 목은집에 전한다. 나옹백운화상, 경한무학자초, 대지국사지천 등이 그의 대표적 문도이다.


나옹선사 부도및 석등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 


나옹선사는 고려국 공민왕나옹대화상이다. 영해 출신으로 성은 牙씨, 속명은 원혜이며 휘는 혜근이다. 나옹, 강월헌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이다. 1340년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에게 출가하였다.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배웠다. 원의 순제에 의해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개당법회를 열고 금란가사를 받았으나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다시 지공에게 갔다가 1358년에 귀국하였다. 회암사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 법복, 바리 등을 하사받고 왕사에 봉해졌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나옹은 쫓겨났다. 그래서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불이사상의 토대에서 선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을 기본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하여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무학대사 부도와 석등 비,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는 조선국 태조왕사무학대화상이다. 합천 삼가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 당호는 계월헌이다. 충혜왕5년(1344년) 소지에게 출가하였다. 혜명국사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충목왕2년(1346) 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공민왕2년(1353)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여러 곳에서 수도하다가 1356년 귀국하였다. 그 후 나옹에게 佛子를 받았고 또다시 송광사에서 의발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 회암사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다.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용문사와 금강산 진불암에서 수도하다가 1405년 금강암에서 입적하였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멧돌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제13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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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