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하고자 한 志, 포화로 폭발하다

최무선 이후 임진왜란까지, 이름 없는 화포에서 잘 알려진 비격진천뢰, 다양한 총통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킨 건 화약무기다. 화약무기는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의지에서 탄생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한 志, 포화로 폭발하다

 ‘포방부’라는 말이 있다. 강력한 포병전력 등 화력에 집중한 대한민국 국군의 무기체계 및 군사전략을 이르는 신조어다. 과거에도 그랬다. 최무선 이후 임진왜란까지, 이름 없는 화포에서 잘 알려진 비격진천뢰, 다양한 총통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킨 건 화약무기다. 화약무기는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의지에서 탄생했다.


01.보물 비격진천뢰 보물 중완구, 보물 현자총통 ⓒ국립진주박물관



지키고자 하는 의지, 화약무기 발전 가져와

1377년(우왕 3년) 최무선의 기여로 화약과 화약무기의 자체 생산이 가능해진 이후, 국토를 수호한 주요 무기는 화약무기였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과거부터 대륙과 해양에서 외침이 잦았고, 대규모로 밀려드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화약무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침입하는 적을 원거리에서 제압하기에 매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최무선이 화약무기 국산화에 성공하자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1380년(우왕 6) 진포와 1383년(우왕 9) 관음포에서 왜선과 왜구를 섬멸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 사용된 대장군포, 이장군포 등 화약무기는 기록으로만 전하고 있지만, 고려 때 이미 체계적인 화약무기가 갖춰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화약무기 발전이 잠시 침체되었다. 하지만 태종 대에 이르러 화통군이 창설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특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화약천재’로, 조선 전기 화약무기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세종과 문종 대에는 전국 단위로 염초를 생산하였으며, 화약무기 개발에 전념할 총통위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총통의 개량과 일발다전이 가능한 화차 등을 제작하며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쏘아진 발사체 수에 따라 이름이 매겨진 이총통, 삼총통, 사전총통, 팔전총통 등과 세계 최초의 ‘권총형 총통’인 세총통 그리고 문종 화차 등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한반도의 판도를 확정하였다. 그야말로 조선의 전성기이자 화약무기 발전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02.보물 만력기묘명 승자총통 ⓒ국립중앙박물관 03.사전총통기 화차(문종화차) ⓒ국립진주박물관



국란을 극복한 우리의 진정한 힘

16세기 이후, 조선의 화약무기는 변혁을 맞이한다. 중종 대 삼포왜란과 명종 대 을묘왜변은 중대형 화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기존의 천지현황포가 개량되었고 명에서는 불랑기포가 도입됐다. 선조 대에는 승자총통이 제작되었다. 승자총통은 기존 소형 총통에 비해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철환을 사용해 파괴력이 증강되었다. 여기에 더해 가늠자와 가늠쇠, 목가가 부착된 소승자총통은 마침내 조준사격이 가능해진 전통 개인화기의 최종 형태였다.

그러나 1592년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의 규모는 조선의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으로 단련된 15만 8,000명의 대군은 당대의 첨단 무기인 조총과 강력한 보병전술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열세에도 조선은 수군의 활약과 육군의 분전, 의병의 활약, 명군의 개입 등에 힘입어 국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관군과 의병의 손에는 화약무기가 들려 있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미리 비축하였던 화약과 총통을 활용해 적을 막아내었고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화력전을 펼쳐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뒤이은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은 수적 열세에도 대형 화포류와 화차 등 압도적 화력으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개전 초기의 위기를 벗어나 일본군을 남해안 지역으로 몰아낸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화약무기의 적극적 활용도 주효했던 것이다.

화약무기는 조선 함대의 무패신화에도 함께했다. 천지현황포 등 대형 화포로 적선을 부수었고 승자총통 계열의 소형 화약무기는 적병을 사살하는 데 용이했다. 또한 총통을 장착한 판옥선은 평저선으로, 방향 전환이 용이해 손쉽게 함포에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안골포해전에서 적장 구키 요시타카의 대장선에 박힌 대장군전은 조선 함대의 화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해저에서 인양된 중완구, 현자총통, 승자총통 계열의 화약무기는 조선 함대가 사용한 화약무기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화약무기는 이 땅에서 살아간 우리 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다. 기술의 수준은 정치·사회·문화 그리고 지리적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조상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했고 묵묵히 그 길을 나아가고자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어려움을 뚫고 끈기 있게 나아가 K-9 자주포, K-2 흑표전차, KF-21 등 명품 무기를 만들어 내었다. 과거의 조상이 그러했듯, 오늘날 우리가 그러하듯, 우리의 후손도 그러할 것이다.  출처 / 김명훈(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