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미인도

 남성 마음 홀리는 미인도



▲ 신윤복 미인도. 114×45.2cm. 간송미술관 소장


 "달걀형의 가름한 얼굴,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 가늘고 긴 목, 좁은 어깨…."

 혜원(惠園) 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는 조선 후기 미인도 중 최고 명작으로 일컬어진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자 최순우(1916~1984)는 "염려(艶麗·요염하고 아름다움)하고도 신선한 풍김은 바라보고 있으면 혜원이라는 작가가 그 수많은 풍속도를 그린 것이 어쩌면 이러한 본격적인 미인도를 그리기 위한 발돋움과도 같은 작업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이 미인도에서는 난숙한 느낌이 넘치고 있다"고 감탄했다.

 초상화 주인공은 일반 여성이 아닌 기생이다. 이 여인은 어떤 연유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을까. 그림 왼편 제화시(題畵詩)에서 그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내 가슴 속에 춘정이 넘쳐나니 붓끝으로 겉모습과 함께 속마음까지 그려냈네(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 초상화 모델은 신윤복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혜원은 사실 그가 살던 시대만 해도 그저 저잣거리를 전전하던 무명 작가였다.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이 거의 없어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성호 이익 손자인 이구환은 "마치 속세를 떠난 사람 같으며 항간의 사람들과 어울려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낸다"고 묘사했다. 신윤복 호 혜원은 '혜초정원(蕙草庭園)'을 줄인 말이다. 혜초는 콩과 식물로, 여름에 작은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이다. 스스로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는 처량한 신세를 빗댄 것이다.

 혜원이 유명세를 얻은 것은 근대에 와서다. 1902년 이후 한국에서 미술을 연구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가 그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혜원의 그림을 보면서 "시정촌락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렸다"고 극찬했다.



▲ 송수거사 미인도. 121.5×65.5cm.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신윤복은 양반층 풍류나 남녀 간 연애, 향락적인 생활을 주로 그렸다. 특히 남성 위주 사회에서 이전 화가들이 무관심했던 여인들 풍속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던 기녀를 주인공으로 기방이나 여속에 대한 관심을 고도의 회화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중 걸작품이 바로 '미인도'다. 가체를 사용한 탐스러운 얹은 머리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길이가 짧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은 저고리를 입었으며 속에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큰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체의 관능미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쪽빛 큰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하얀 버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과 풀어헤친 진자주 옷고름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혜원은 염모했던 여인 모습을 화폭이 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여인의 자태는 곱지만 뭔가 모르게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에 손으로는 노리개만 만지작거린다. 신윤복은 여인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여인도 그러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그림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미인도이기도 하다. 이후 혜원풍 미인도가 크게 유행한다. 혜원풍 미인도는 자세나 구도, 무엇보다 독상들로 전신상이며 일반 사대부 초상화와는 달리 배경 묘사가 공통적으로 생략돼 있다.



▲ 도쿄대 소장 미인도. 114.2×56.5㎝.


 1977년 동방화랑에서 개최된 '한국고서화명품선'에 또 다른 미인도가 한 폭 등장한다. 송수거사(松水居士) 미인도(온양민속박물관 소장)로 다소 창백하며 희고 차가운 얼굴 표정과 눈매, 손 처리 등에서 혜원의 미인도와 매우 흡사한 작품이다.

 우상단 묵서가 적혀 있어 화가와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시기는 1838년으로 비정된다. 송수거사는 이인문(1745~미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인문이 즐겨 그린 것은 풍속화나 진경산수보다는 정형산수가 주류를 이뤄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 특히 그림에 화가가 이인문임을 표시하는 관인(款印)이 전혀 없는 것도 미심쩍다.

 일제강점기 1100점에 이르는 방대한 우리 문화재를 끌어모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 컬렉션에도 미인도가 들어 있다. 오구라 컬렉션이 1981년 7월 도쿄박물관에 기증되면서 이 미인도도 함께 이 박물관으로 넘어갔으며 1998년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한 '조선후기국보전, 위대한 문화 유산을 찾아서'를 통해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작자 미상이며 전체적으로 화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혜원풍이지만 자세, 옷, 안면 처리에서 혜원과 구별되며 얼굴도 큰 편이다. 오른손은 치마 뒤로 가려졌고 왼손은 배꽃을 쥐고 있다. 얼굴이 수려하며 쌍꺼풀이 확인된다. 왼쪽에 '을유년삼월기망기소사(乙酉年三月旣望寄所寫)'라는 글씨가 있다. 대체로 1825년 3월 16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산 윤선도 집안인 해남 윤씨 종택 녹우당에도 미인도가 보관돼 있다. 혜원의 미인도에는 못 미치지만 기량이나 격조 면에서 다른 조선 후기 미인도를 압도하는 수작이다. 1980년대 들어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98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전 때 처음 소개됐다. 국보 240호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1668∼1715)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그의 손자 윤용(1708~1740)이 그렸다는 말도 있다.



▲ 전남 해남 윤씨종택 녹우당 소장 미인도.117×47cm.


조선후기 미인도는 시대 변화를 반영했다. 이 시기 매우 더뎠지만 조선 신분질서가 변화했고 여성들도 점차 사회 표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출처/배한철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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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