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사용? 그 흔적을 찾아서!

대외교역에 쓰인 고대 한반도의 문구(文具)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시각을 어떻게 공유했을까?

문자 사용? 그 흔적을 찾아서!

대외교역에 쓰인 고대 한반도의 문구(文具)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시각을 어떻게 공유했을까?  완전하진 않지만 그들에게도 의사소통의 수단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문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문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형태와는 좀 다르지만, 고대 한반도인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했다. 그들의 말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그 근거를 발견했다.


00.다호리 고분군은 현재까지 밝혀진 원삼국시대 전기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붓과 손칼은 제1호분의 요갱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인 증거로 본다. ⓒ국립중앙박물관

01. 중국 화폐 오수전과 성운경 등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호리 고분이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후반 사이의 유적임을 알려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고대인도 문자가 필요해

문자는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기호다. 선사시대 이래로 여러 형태의 문자가 사용됐는데, 언어가 지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정보의 전달과 저장을 위해 일정한 체계로 고안됐다. 결과적으로 문자는 금방 사라지는 정보를 오래 남기고 상호 의사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전체 사회를 조직하는 한편, 축적된 지식을 후대까지 전승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특히 고대에서 문자와 기호는 기억을 돕거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정보 공유와 사회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고고학에서도 문자의 사용은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  한자 유입 이전의 문자 자료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토기 저부에 새긴 기하학적인 도형, 선 등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이에 비해 청동기시대에는 암각화나 토기, 청동기에 새겨진 그림 여러 점이 발견되고 있어, 종족 구성원 사이에서 사용된 상징기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부 그림은 일종의 그림문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표음문자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는 중국의 표의문자인 한자가 쓰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자의 본격적인 유입 시기는 대체로 중국의 중원(中原) 문화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기원전 3세기 이후로 본다. 한자로 된 명문이 있는 진과(秦戈, 진나라 꺾창)와 동모(銅)의 출토가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이후 한(漢) 또는 낙랑과 접촉하면서 한반도는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는 시대에 들어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대(漢代)의 명문(銘文)이 있는 동전(오수전, 화천 등)과 동경(銅鏡), 벽돌과 와당(瓦當) 등을 보았을 때, 특히 상류층 사회에서 한자 사용 분위기가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문대(銘文帶)가 새겨진 한경, 예를 들어 소명경·일광경·청백경 등의 유입은 상류층에서 한자에 관심이 높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군주에게 충성, 부귀영화, 자손번창, 장수 등 기복에 대한 문구가 지배층과 상류층에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02.옻칠을 한 칼집과 동검 및 철검도 출토되었는데, 이를 볼 때 계급이 높았던 상류층의 고분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03.붓과 손칼 교역용 철부 모음



고대 한반도의 문구(文具) 사용 흔적

‘문자’가 직접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문자와 밀접하게 관련된 자료로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의 제1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후반대의 붓과 손칼[削刀]이 있다. 통나무 목관이 안치된 묘광 중앙부의 구덩이 속에 대바구니가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옻칠 칼집 동검을 비롯해 중국 전한(前漢)대의 유물인 성운문경, 오수전, 청동대구, 쇠도끼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붓과 손칼이 포함되어 있었다.

붓은 5점이 나왔는데 길이가 모두 23cm 전후의 것이었다.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대에 이르는 시기의 붓과 길이가 비슷하며, 후한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의 한 구절, “지혜가 충분한 사람은 모름지기 세치 혀와 일척의 붓으로 일을 한다(知能之人 須三寸之舌 一尺之筆)”의 1척(약 23cm)과 거의 동일한 길이였다. 또한 붓대의 한쪽 끝에 구멍을 뚫어 붓털을 삽입한 뒤 붓대의 머리 위쪽에만 실을 감아 묶고 옻칠을 한 것도 중국에서 출토된 서사용 붓과 공통점이다. 다만 붓대의 양쪽 끝에 붓털을 끼워 사용한 것이 중국의 붓과 차이 난다.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화한 것으로 보인다.

04.사적 제450호 사천 늑도 유적의 출토 유물. 교역에 사용되었던 저울추 및 벼루 등이 발견되었다. ⓒ국립진주박물관

05. 다호리 출토품 일괄 ⓒ국립중앙박물관



손칼은 오늘날 지우개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종이 대신에 대나무 쪽이나 나무판에 붓으로 글씨를 쓰고, 글씨를 잘못 적었을 경우에는 손칼로 그 글씨를 깎아 내고 다시 썼다.

중국 후한의 유희(劉熙)가 지은 『석명(釋名)』에도 “書刀, 給書簡札, 有所刊削之刀也”라고 쓰여 있어, 간찰(簡札 :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주고받는 글로 옛적에는 나무쪽에 쓴 것이 많음)에서 오자(誤字)를 지우는 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붓과 손칼은 현대의 연필과 지우개관계로서 문자 사용자의 필수도구였던 셈이다.

문자 사용의 강력한 증거, 고대 영수서

고대 세계에서 문자는 특히 교역 같은 경제활동에 필수였을 것이다.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축적하는 역할도 했겠지만, ‘주고받았다는 증거’ 다시 말해 ‘영수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했을 것이다. 다호리 고분군의 붓과 손칼도 바로 그런 용도로 보인다. 쇠도끼 형태인 한(韓) 지역의 철 소재나 동경·대구·오수전 같은 중국 전한(前漢)시대 유물과의 교역에서 영수서 작성을 위해 쓰인 문구(文具)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붓과 손칼의 존재는 『사기(史記)』 조선 열전의 “眞番蒡衆(辰)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漢使…”라고 하는 기사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자료다. 기사 내용은 진국(辰國)이 한(漢)의 조정과 직접 통하려 하다가 조선왕 우거에게 방해를 받았다는 것으로, 이 부분에서 ‘글을 올려[上書]’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즉,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에 이미 우리나라 남부 지역의 상층 계급에서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사기록을 유물로써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붓과 손칼이다.

한자로 된 문자를 한반도의 상층 지배계급이 사용했음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진한인(辰韓人)은 낙랑을 아잔(阿殘)이라 하고 … 나라를 방(邦)이라고 불러 중국 진나라 사람[秦人]과 흡사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에 적어도 상류층에서는 중국인과 필담(筆談)을 나눌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중국(낙랑)과 왜 그리고 연안을 통해서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사적 제450호 사천 늑도 유적이 대표적인 근거다. 이곳에서 많은 외래 교역품이 출토되었는데, 교역에 사용되었던 저울추와 함께 서사용구인 벼루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삼한의 변진 지역에서 철을 소재로 낙랑 및 왜와 교역을 했으며 이때 필요했던 것이 무게를 다는 저울과 저울 추 그리고 서사용구인 붓과 손칼, 먹과 벼루, 목간 등이었다고 생각한다.

먹과 글씨가 쓰여 있는 목간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 시기의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문자가 사용되었고 본격적인 역사시대에 돌입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글. 이건무(고고학자, 제4대 문화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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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