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함의 끝을 보여주는 문화재 사경장(寫經匠),

국가무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 수많은 옛 경전은 어떻게 전해져 왔을까?

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함의 끝을 보여주는 문화재
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함의 끝을 보여주는 문화재 사경장(寫經匠),

국가무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 수많은 옛 경전은 어떻게 전해져 왔을까? 활자가 나온 이후에는 활자로 찍은 판본도 많지만, 활자 이전 그리고 활자 이후에도 많은 경전이 사람의 손으로 쓰였다. 왜일까? 활자로 찍어내는 것에는 없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정성’이다. 편지 한 장도 손편지로 쓰면 더 정성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적어 내려가는 건 정성을 다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다. 특히 옛 선조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불경’을 옮겨 적는 일에서 이 정성스러운 방법이 발달했다. 그것을 ‘사경’이라 부른다.


01. 경을 필사하는 모습 02.변상도를 제작하는 모습



널리 불교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
사경은 경전을 필사하는 것으로, 불교의 전래 및 전파와 직결되는 일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 사경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경은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삼국시대 무렵부터 행해진 것으로 본다. 특히 불교가 당시 정치와 문화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경전을 사성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관련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초기에 사경 작업은 아무래도 불교 교리에 익숙하면서 글도 능숙한 승려들이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명필로 널리 알려진 김생이 사경을 많이 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화엄불국사사적』에는 당시 왕후장상, 명필, 승려들이 사경을 많이 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사경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신분을 통해 사경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경전 수요가 일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점차 크게 늘어났다. 이는 인쇄술의 발달을 불러왔으며 8세기 중엽부터는 널리 보급된 목판 인쇄술이 사경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사경은 단순히 불교 경전을 보급하는 필사 수단이 아니라, 개인적인 공덕을 세우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전환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으로 신라 경덕왕 13년(754년)에 연기법사가 간행을 시작해 이듬해인 755년에 완성된 것이다.

이 사경의 발문 조성기에는 사경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19명의 인물에 관해 자세히 적혀 있으며, 사경 제작 방법과 그에 따른 의식절차를 적은 간행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지작인과 경필사, 화사, 경심을 만든 사람, 경의 제목을 쓴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사경이 분업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03.국보 제235호 감지금니 대방광불 화엄경보현행원품



신앙 측면이 더욱 강조된 고려시대의 사경
고려시대의 사경은 실용성보다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경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초기에는 금니, 은니 사경이 주로 사찰에서 사성되었는데, 명종 11년(1181년)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는 사경원이 설치되었다. 이는 사찰에 임시로 설치된 사경소에서 사경의 사성이 이루어지던 이전과 달리, 사경 제작이 독립적인 국가 기구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며, 매우 전문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게 한다.

충렬왕 이후에는 금니, 은니 사경 사성 기법이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100명의 사경승이 원나라에 파견되어 중국의 금니, 은니 사경 대장경을 사성해 주고 돌아오는 한편, 원나라에서 고려에 감독관을 보내어 대장경을 사성해 가져가기도 했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금니, 은니 사경의 바탕지인 고려청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원나라가 환자 방신우를 보내자 고려왕이 사경승과 경필사 300명을 모아 대장경을 사경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금니, 은니 사경 사성 수준과 국가적 차원의 지원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공덕을 쌓고, 수복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조선시대에는 국왕을 위시한 왕비, 대군, 군, 공주, 옹주, 여러 빈이 국시에 위배됨을 알면서도 사적으로 불전에 속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혹은 살아 있는 자의 수복을 기원하거나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간행하고 사경을 행했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사경 관련 전담 기관이 없었으므로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나 승려가 사경에 참가했으며 금니, 은니 사경의 제작은 줄어들고 주로 백지에 묵서로 사경이 서사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에서 사경을 발원했다.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이 그를 추도하기 위해 서천군 한상경, 형조참의 이규 등 7인으로 하여금 『금니묘법연화경』을 사성케 했고, 세종 역시 당시 사경 서체 구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성달생에게 사경의 제작을 권유하기도 했다. 특히 세조는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금강경』과 『반야경』을 손수 사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종 7년(1425년)에는 『법화경』을 금과 은으로 쓴 사경승 성준을 금령위반으로 보고한 기록이 있어 이 시기 존재했던 전문 사경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사경승은 조선 중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말기인 1880년(고종 17년) 고종비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금니법화경』을 서사한 기록에서 사경승인 원기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1896년 선암사에서 『화엄경』 사경을 시작해 6년 만에 완성했다는 사경승 원기의 일화가 전해진다. 자료.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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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