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 뒤틀린 근대

식민통치의 장소들, 수탈의 현장들은 분명 ‘일제 잔재’에 속하지만 굴절된 근대와 극복의 노력이 뒤얽힌 공간으로서, 한국인을 깊은 성찰로 이끄는 근대 유산이라 하겠다.

빼앗긴 들, ‘뒤틀린 근대’
공간으로 읽는 근대

개항 이후 자주적인 개화 시도가 좌절된 이래, 서구 근대는 제국주의 일본의 변형을 거쳐 한반도에 이식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의 제도와 문물이 굴절된 형태로나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적 발전이 일부 이루어졌어도, 근대의 이익을 배분하는 권한은 일본의 손안에 있었다. 수탈의 당사자였던 식민지 민중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이 발전의 이익을 압도했다. 해방된 가난한 신생국은 ‘일제 잔재’를 대부분 떠안고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통치의 장소들, 수탈의 현장들은 분명 ‘일제 잔재’에 속하지만 굴절된 근대와 극복의 노력이 뒤얽힌 공간으로서, 한국인을 깊은 성찰로 이끄는 근대 유산이라 하겠다.

한반도의 근대와 제국주의 침략은 샴쌍둥이다. 자주적인 개화의 노력이 잠시 시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서양의 근대는 제국주의 일본의 힘에 의해 이식되었다. 들은 빼앗겼고, 근대는 굴절된 상태로 전면화되는 경로를 밟았다. 국권이 상실된 터라 근대의 이익을 배분하는 권한은 일본의 손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의 제도와 문물이 뿌리내렸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후일 산업화의 과정에서 침략의 시기에 도입되고 설치된 근대 시스템이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에서 산업화에 이르는 한국 근대의 전개과정을 생산력의 연속적인 발전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강탈한 자와 빼앗긴 자의 간극은 근대의 숫자와 통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굴절된 근대화일망정 생산력은 상당히 개선되었으나 수탈당한 식민지 민중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혜를 입은 계층과 중하위 계층 간의 상대적 격차는 오히려 갈수록 벌어졌다. 전기, 철도, 의료 등 근대의 혜택은 고르지 않았다.

해방 후 일본은 다양한 지배와 수탈의 공간들을 남겨 놓고 철수했다. 신생 독립국은 상당수의 ‘일제 잔재’를 인수해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근대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역사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공간들은 그러므로 한국 근대의 굴절과 극복 노력이 얽힌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근거지였던 장소들 역시 뒤틀린 근대를 바로잡으려고 도전한 공간으로서 깊이 읽어 볼 만하다.

제국주의 일본은 군사력과 경찰력을 앞세웠다. 농민과 어민을 내쫓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가 하면, 초기에는 헌병 경찰로, 3ㆍ1운동 이후에는 일반 경찰로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조선인을 윽박질렀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의 옛 요항사령부는 군사력 과시의 예에 해당하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구 마산 헌병 분견대와 전라남도 나주의 구 나주경찰서는 경찰력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보여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시기에는 제주도에 알뜨르비행장을 닦고, 주변에 지하벙커를 만들어 제주도민을 ‘결사 항전’의 최전선으로 내몰려 하기도 했다. 무자비한 국가 폭력의 씨앗은 일제강점기 동안에 뿌려졌다. 국가권력의 원초적 억압기구들은 필요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 알뜨르비행장지하벙커 /  비행기격납고

조선총독부는 500년 한반도 중심도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192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사를 지어 조선 왕실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한편 경성의 도심을 자신의 구상대로 개조했다. 1930년대에는 인천부청사를 비롯해 조선 주요 도시의 행정 관청을 신축해 새로운 도시경관을 만들어 나갔다.



구 인천부 청사

농업 수탈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가운데 조선총독부와 밀착된 인물들은 손쉽게 대지주로 성장했다. 전라북도 김제의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는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게’ 농토를 넓혀간 하시모토의 소작인 관리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흉내 낸 동양척식회사는 더 손쉽게 땅을 차지했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정한다며 왕실과 왕족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 동양척식회사의 마크를 여전히 달고 있는 대전지점 건물이 남아 있다.



대전 구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

조선총독부는 산미 증식계획을 세워 쌀 수탈을 노렸다. 관개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한다며 전국 곳곳에 수리조합을 세웠는데, 수리조합의 관리비와 운영비는 소작농에게 전가되기 일쑤였다. 전라북도 익산의 익옥수리조합은 위세 당당한 사무실을 1930년 건립했다.

임야도 수탈의 주요 표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에 이어 임야조사사업을 진행해 조선사람들이 마을 공유지처럼 이용하던 산을 입산도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일본의 제국대학들에는 대규모 임야를 연습림 명목으로 무상 대부해 주었다. 경상남도 함양의 옛 임업시험장 하동ㆍ함양 지장은 원래 교토제국대학의 연습림 관리사무소였다.



함양 구 임업시험장 하동∙함양지장 측면 / 우측(사진출처:문화재청)

반면 울창한 산림은 벌채하여 목재를 반출하도록 했다. 경상북도 울릉군 도동리 일본인 가옥은 고리대금업과 벌채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가옥이다. 사카모토 나이지로는 1890년대 말에 이미 울릉도에 진출해 있었다.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가옥 전경,  가옥내부 (사진출처:문화재청)


경인선ㆍ경부선ㆍ경의선에 이어 경원선이 1914년 개통됨으로써 한반도의 철도망은 벌린 가위 형태로 완성되었다. 주요 철도를 놓으면서 철도가 갖는 근대적 상징성을 내세웠지만,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침탈이 철도 부설을 서두른 실제 의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조선인은 별로 없었다. 서울과 원산의 중간지점인 경기도 연천역에는 증기기관차가 중간에 물을 싣기 위한 대형 급수탑이 세워졌다.


                                                                                연천역 급수탑

전기도 일제강점기 동안 빠르게 보급되었다. 전차는 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 되었고, 전기회사는 집에도 전등을 밝히려는 서민의 욕망을 자극했다. 경성전기 주식회사는 주주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원성이 자자했지만, 경성의 남대문통에 24시간 전기를 환하게 밝힌 5층짜리 최신식 사옥을 지어 세를 과시했다.

경성의 구 용산철도병원은 근대 의료를 앞세워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의료기관의 상징과도 같았다. 구 용산철도병원은 조선의 3대 관공립병원으로 꼽힐 정도였으나 평범한 조선인에게는 문턱이 높았다. 일본 자본의 한반도 진출을 촉진하는 은행도 속속 들어왔다. 나가사키에 본부를 둔 일본 국립 제18 은행이 전국 여러 도시에 지점을 설치했다. 쌀 수출항 군산에 제18 은행이 설치했던 지점 건물 같은 근대 은행의 지점이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서울 구 용산철도병원 본관

일본 자본에 대항하여 민족 자본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 은행들도 있었다. 호남은행이 대표적이다. 호남의 부자들이 출자해 설립한 호남은행은 목포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 지점을 두고 영업했다.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제재 속에서도 버티던 민족계 은행들은 일제강점기 말기 결국 합병의 길을 걸었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함양할 목적으로 한인들이 뜻을 모아 지은 근대 건축물도 곳곳에 남아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의 조양회관이 대표적이다.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중심이 되어 1922년 지어진 조양회관은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한편 근대적 건축물은 아니지만, 전라남도 곡성의 단군전은 역사학자 신태용이 1914년에 지어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한 공간이다.


대구 조양회관


곡성 단군전

전라남도 고흥의 소록도는 식민지 시절 이중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사연을 간직한 공간이다. 1910년대부터 들어선 소록도의 한센인 병원과 수용시설은 육지의 한센인을 가두고 억압하는 시설이었다. 1930년대에 시설을 대폭 확장하는 과정에서 비극적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배제와 망각이라는 근대의 어두운 그늘에 갇힌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사무본관과 강당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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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