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본 민의의 발현 19세기 말 나라 안팎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백성[民]들의 삶을 도탄(塗炭)에 빠트렸다. 생존권을 위협 당한 백성들은 동학이라는 이름 아래 뜻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한다.

1894년 갑오년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01.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금강, 1894>의 한 장면 ©성남문화재단

 

02. 전봉준-사적 제295호 정읍 황토현 전적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정치적 상황

19세기 말 조선은 낡은 봉건제도의 개혁이 절실했으나 소수 문벌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 정치라는 수렁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밖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공공연한 국권 침탈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나라 안팎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농민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 세도 정치의 폐해에 따른 이른바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수취 제도의 난맥상(亂脈相)은 조선 정부의 통치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는 곧 탐관오리(貪官汚吏) 양산으로 이어져 기층 농민들을 고통에 빠뜨렸고,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수탈은 농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상대적으로 곡창지대에서 더욱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고종 29) 4월 28일 전라도 김제만경평야의 요지에 자리한 고부군 지방관으로 조병갑이 임명되었다.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를 축조하면서 약속한 것을 어기고 추수 때 강제로 수세(水稅)를 징수했다.

 

진황지(陳荒地)를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경우 일정 기간 세금을 유예한다는 약속도 어기고 추수 때 3만 냥을 거뒀다. 또 일찍이 태인현의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碑閣)을 건립한다고 1,000여 냥을 거둬들이는 등 고부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에 고부 농민들은 고부관아와 전라감영을 찾아가 가혹한 세금 징수 등에 대해 등소(等訴)했으나 도리어 난민으로 취급받아 곤장을 맞고 쫓겨났다.

 

생존을 위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고부 농민들은 1893년 11월 전봉준을 필두(筆頭)로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병갑을 익산군수로 전임시키고자 했으나 고부군수 후임자들이 연달아 부임을 고사해 1894년 1월 다시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잉임(仍任, 유임)시켰다. 이에 격분한 고부 농민들은 1월 10일(양력 2월 15일) 봉기해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전라북도 기념물 제 33호 만석보지)를 부수고 곧장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역사학계는 이 사건을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導火線)으로 인식하고 있다.

 

03. 만석보지(萬石洑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문화재청

04.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 사적 제293호.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살았던 집 ⓒ문화재청

 

제1차 동학농민혁명, 전주성의 함락과 폐정개혁안

고부 농민들이 봉기해 관아를 점령한 후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하는 등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조선 정부는 전라감사 김문현과 고부군수 조병갑을 파면하고 후임을 임명해 고부 농민들을 달래면서, 한편으로는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使)로 임명해 고부농민봉기 진압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두 달 가까이 이어진 고부농민봉기는 진압되었다.

 

이후 고부농민봉기를 지도했던 전봉준 외 50여 명은 무장현에서 동학 포교 활동을 벌이던 손화중 대접주를 찾아가 전국적인 농민 항쟁의 필요성에 합의, 갑오년 3월 20일 무장포고문을 공포(公布)하고 혁명의 대장정에 올랐다. 무장기포 이후 동학농민군은 5월 11일 정읍 황토현(사적 제295호 정읍 황토현 전적)에서 전라감영군을, 5월 23일 전라남도 장성 황룡(사적 제406호 장성 황룡 전적)에서 경군(京軍)을 격파하고 5월 27일 전라감영 소재지이자 전라도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놀란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텐진조약을 근거로 일본군도 조선으로 들어온다. 상황이 급변하자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撤兵)을 요구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에게 전주성을 비워줄 것을 요청했고, 동학농민군은 구국의 결단으로 근대적인 폐정개혁안을 제시한 후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05. 장성 황룡 전적(長城 黃龍 戰蹟) 사적 제406호.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의 전적지 ⓒ문화재청

06. 공주 우금치 전적(公州 牛禁峙 戰蹟) 사적 제387호.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 연합 부대를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 ⓒ문화재청

 

제2차 동학농민혁명, 반일 민족항쟁으로 확대

동학농민군이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자마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 측에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다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한 후 친일 내각, 청일전쟁 도발이라는 폭거를 자행했다. 일본군의 도발에 의해 조선의 산하가 전화(戰火)에 휩싸이자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10월 8일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 항전이라는 명분 아래 동학농민군의 기치를 다시 올렸다. 이때에는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등 전국의 백성들이 가세해 전국적인 반일 민족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도 삼례에서 북상(北上)하던 동학농민군은 11월 9일경 충청도 논산에서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지의 농민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충청감영을 점령하고자 공주 우금치(사적 제387호 공주 우금치 전적)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 부대를 맞아 수십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과 그 의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중세의 낡은 질서를 개혁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만민 평등 세상을 추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다. 또한 19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서세동점시기(西勢東漸時期) 외세의 국권 침탈, 특히 일본의 침탈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반일 민족항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족주의운동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그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 사건으로 치부되어 왔다.

 

갑오년 겨울,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 부대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쓰러지면서 미완의 혁명으로 마감되었지만 갑오 선열의 숭고한 정신은 구한말 항일 의병, 일제강점기 3·1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해방 이후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 근현대 민족민주운동의 본원(本源)으로 자리해 왔다.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후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고, 해방 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 시기에 빚어진 민족 내부의 극심한 좌우 대립, 민족 분단, 한국전쟁 등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사학자 또는 식민사학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민족항쟁으로서의 의미를 거세(去勢)하고 ‘동비(東匪)의 난’, ‘비적(匪賊)의 난’ 등으로 왜곡했고, 전라도 고부의 지역적 ‘민란(民亂)’ 등으로 축소했다.

 

다행스럽게 지난 1980~90년대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혁명 100주년을 전후해 전국에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이 펼쳐져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화되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대중적인 역사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년 3월 5일)이 제정되었다. 나아가 지난해에는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맞서 크게 승리한 황토현전승일(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2019년 2월 26일)되었다.  출처: 글.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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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