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건국과 전라도의 탄생

고려의 건국과 전라도의 탄생

설화로 보는 전라도라는 이름이 있기까지의 이야기

 

고려경종, 성종 대에 이르러 전라북도 일대를 강남도(江南道), 전라남도 일대를 해양도(海陽道)로 바꾸었다. 이윽고 현종 9년인 1018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라주도(全羅州道)를 설치했다.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딴 것이 지금의 전라도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흥룡동(興龍洞) 완사천(浣紗川)에서 빨래하던 오 처자

왕건이 급하게 말을 몰아 나주에 들어섰다. 영산바다 파군교에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고 내달린 길이라 숨이 가쁘고 목이 말랐다. 지금의 완사천에 이르니 마침 빨래하는 처자들이 보였다.

“낭자, 물 한 그릇 얻어 마십시다.”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한 처자가 물그릇을 건네주었다. 건네는 쪽 바가지 안을 보니 버들잎을 띄워 두었다. 목이 마르던 차인데 벌컥벌컥 마실 수 없어 눈을 부라렸다.

“왜 버들잎을 띄운 것이오?” 처자가 대답했다. “보아하니 목이 많이 마르신 듯합니다. 급하게 물을 마시게 되면 체한답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왕건이 크게 감동하여 나이와 이름을 물었다. 18세의 오씨 성을 가진 처자였다. 이 물 한 바가지가 인연이 되었을까? 훗날 이 처자가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가 된다.

나주 완사천

 

나주 동강면과 무안 몽탄면 사이를 흐르는 몽탄강

 

나주를 비롯한 무안, 영암 등 영산강 지역에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오는 설화다. 왜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져올까? 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설화는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라고 한다. 허황되고 과장된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행간을 읽게 되면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숨어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기록이 대개 이긴 자들을 편드는 역사라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는 진자들을 편드는 역사라 할 수 있다. 바로 말하지 아니하고 비틀거나 꽈서 은유하고 환유하는 장치를 고안하기 때문에 구비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오 처자의 아비 오다련과 왕건을 도운 금강의 세력들

완사천에서 물을 건넸던 오처자의 아비는 오다련이다. 오다련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지금의 영산강인 금강 하구에 누런 금빛의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오는 꿈이었다. 날아오더니 이 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앉아버렸다. 길몽이었다. 왕건에게 딸을 시집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꿈 이야기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왕건이 파군교에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친 것도 백발노인이 나타나 선몽 해준 꿈과 관련되어 있다. 지명이 지금의 꿈여울(夢灘)이 된 이유다. 꿈은 생시의 기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왕건이 파군교를 넘어 금성 남쪽에 이르니 오색구름이 어려 있었다. 상서로운 기운이라 생각하고 말을 달렸는데, 완사천의 오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비 오다련은 나주 금성의 권세가였다. 견훤과의 전쟁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에 되는 세력들이다. 나주 금성의 지원을 받아 왕건은 승승장구했다. 모시고 있던 궁예를 물리지고 지휘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종국에는 견훤세력을 모두 물리지고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다. 장화왕후 오씨가 낳은 아들 이름이 무(武)다. 고려 2대 왕이 된 혜종이다. 태어나서 등을 보니 조석(草) 문양이 있었다. 조석은 짚이나 부들 따위로 엮어 만든 자리를 말한다. 모두 길한 징조라 여겼다. 오늘날 초석을 왕골자리라 부르는 것은 혜종의 등에 있던 문양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흥룡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 세력들이 왕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나라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이 지역을 통할하던 견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1872년 나주지방지도(출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영산강

무의사

 

사의재(정약용의 유배지)

나주 금성산

나주 금성산성

 

전쟁에 져서 지렁이 이야기로 남은 후백제의 견훤

견훤 이야기는 광주를 중심으로 지렁이 설화로 전해온다. 성씨는 이(李) 혹은 진(甄)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견훤 설화는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였다 해서 신비로움을 강조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 탄생설화는 비범하긴 하지만 거대한 지렁이(土龍)의 아들이라 표현한다. 남도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설화의 대부분은 지렁이 이야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장성지역에 전해오는 고산마을 설화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신라 말 한 부잣집 딸이 밤마다 이목구비가 준수한 청년과 동침을 했는데 딸 방에서 자고 가는 청년의 도포자락에 명주실 한 꾸리를 바늘로 꿰어 따라가 봤더니 장군굴 속의 커다란 거미였다는 줄거리다. 딸이 낳은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하는 짓이 거미와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불태산이라 호명하는 거미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믿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 비장이 되더니 이윽고 진훤 이라는 이름을 견훤으로 바꾸고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다. 견훤 설화 중 하나다. 왕건이 일관되게 용으로 표상되는 데 비해 견훤은 지렁이나 거미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화마저도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일까.

 

고려의 건국과 전라도의 탄생

그렇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은 지금의 나주 세력이 뒷받침 해주었기 때문이다. 오씨 처자의 아비 오다련과 그 세력들이 선택한 새로운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꿈 꾼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영산강이 낳은 아들 무(武)를 고려 2대 왕으로 만들었으니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나서 전국의 관할지를 재구성한다.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도 한 몫 거들었다. 고려초에 12목을 설치했다. 전라도 지역에는 전주목(全州牧), 나주목(羅州牧), 승주목(昇州牧)을 두었다. 승주목은 지금의 순천이다. 신라 때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력이 나주에 그 중심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태조 왕건이 영산강의 아들 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 995년이다. 아쉽게도 재위 2년 만에 정종으로 바뀌고 정종 재위 4년 만에 그의 동생 광종으로 왕위가 바뀐다. 이후 경종, 성종 대에 이르러 전라북도 일대를 강남도(江南道), 전라남도 일대를 해양도(海陽道)로 바꾸었다. 이윽고 현종 9년인 1018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라주도(全羅州道)를 설치했다.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띤 것이 지금의 전라도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당시 전라도는 2목(父), 2부(府), 18군(郡), 82현(縣)관할하였다.

 

전주 한옥마을 ,   신안 염전

 

영산강변 무수한 용(龍) 설화가 이야기하는 것들

영산강변에는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들이 무수하게 있고 관련한 설화들이 있다. 우선은 영산강의 시원이라는 용소 설화가 대표적이다. 담양으로 부임한 부사가 명소를 둘러보다 가마골에 가려했으나 어느 노인이 꿈에 나와 현몽하기를 자신이 용인데 내일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 했다. 부사는 호기심에 꿈을 무시하고 가마골에 올랐는데 용소에서 하얀 연기를 뿜으며 용이 승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용은 하늘로 올라가다 떨어져 죽고 부사는 용의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한다. 용이 승천하다 피를 토하고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 줄거리다. 왜일까?  이때의 용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떨어져 죽었으므로 왕건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을 견훤의 상징으로 본다. 대개 담양의 용소로부터 광주에 이르기까지 용자가 들어간 지명들이 무수하지만 대개 견훤을 은유하는 지명들이라고 본다. 나주 이하 지금의 영산강변에 존재하는 용 관련 지명들은 물론 왕건과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있다. 출처 대동문화재단글 이윤선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 회장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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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