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성과 창의성으로 축성된 한국 성곽의 정점 수원화성

실용성과 창의성으로 축성된 한국 성곽의 정점

정조의 수원화성 측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

 

실용성과 창의성으로 축성된 한국 성곽의 정점 수원화성

한국의 성곽은 2천 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한반도에만 해도 2천여 개를 훨씬 상회하는 성곽이 존재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외세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 났던 민중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여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군사시설인성곽이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 역사의 수많은 성곽 중에서도 유독 수원화성은 한국 성곽의 정점이자 성곽의 꽃'으로도 불린다. 한국성곽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수원화성 축성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성곽 축성술뿐만 아니라 서구의 기술을 접목시킨 실학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조선후기 명군 정조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에는 실용성과 창의성이 어우러져 조선 후기 실학정신이 반영되었기에 가능했다.

 

01. 한국 성곽의 정점이자 '성곽의 꽃'으로 불리는 수원화성 이미지투데이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수원부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묘호를 바꾸었다.  현륭원 조성으로 인해 기존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 새로운 읍치로 이전하고 1793년에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794년 1월 수원화성 축성을 시작하였고 당초 예상된 10년보다 훨씬 빠른 1796년 9월에 끝을 맺었다.

 

성곽 축성과 더불어 크게 증가한 화성유수부 백성들의 삶의 기반 조성을 위하여 시장을 형성하고 농업생산량 증가를 위해 만석거 등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또한 장용영 군대 배치를 통해 군사개혁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정조는 수원을 자급자족의 신도시이자 한양도성에 버금가는 별경(別京)으로 만들고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인1804년 갑자년에 상왕이 되어 수원에서의 개혁을 예정하였다.  비록 1800년에 승하하여 의도하던 바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수원화성과 대도시 수원은 우리 곁에 오롯이 남았다 이처럼 정조의 장대한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는 과정에는 정조가 총애하던 명신(名臣)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있었다.

 

정약용의 수원화성 축성 계획과 축성도구 발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반계 유형원은 기존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에서 읍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제안하였다. 유형원의 주장은 100여 년이 지난 18세기에 걸쳐 전국적인 읍성 개축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경제 활동의 거점도시로서의 읍성이 발달되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이었을 때부터 눈여겨 보았고 그가 과거에 급제한 1789년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임명하고 수원으로 원행할 때 사용되는 배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후 정조는 정약용을 곁에 두면서 여러 중책을 맡겼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1792년 말 정약용에게 축성에 대한 계책을 작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 젊은 문관에 불과한 그에게 한양도성에 버금가는 성곽 축성 계획을 맡긴 것은 실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당시 정약용은 부친의 사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치르던 중이었는데 그만큼 정조의 신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축성 전반에 대한 세세한 설계가 아닌, 정조가 직접 정약용에게 내려준 수많은 중국 서적을 바탕으로 대략의 방안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에 정약용은 8가지 축성 방략인 「성설(城說)」을 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은 수원화성의 규모인 푼수(分數, 성의 규모), 재료(材料, 축성재료), 호참(濠塹, 내탁식의 축성법과 해자), 축기(築基, 기초공사), 벌석(伐石, 채석 중 표준화), 치도(治道, 석재 운반을 위한 길닦기), 조거(造車, 석재 운반에 사용될 유형거), 성제(城制, 규자형 성곽 쌓기) 등 이었다.  물론 이 계획 그대로 축성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이 적용되었다.  또한 정조는 정약용에게 청나라에서 들여온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중 하나인 『기기도설(器機圖說)』을 하사하였고 이를 연구한 정약용은 수원화성 축성의 구체적인 계획을 보고하였다.

 

『기기도설』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소개하는 내용을 중국어로 번역한 책이며 저자는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가 명나라에 귀화한 요하네스 테렌츠(J. Terrenz,중국 이름 鄧玉函)이다.  책 후반부에는 도르래의 원래를 이용한 실용적인 기계장치의 해설이 실려 있어 17세기 서구의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은 이 책을 참고하고 직접 새롭게 고안하여 석재를 수레에 싣는 거중기(擧重機)와 석재 운반에 유용한 유형거(遊衡車)를 발명하였다. 축성 실무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도구의 발명과 기존 도구들의 활용으로 축성에 기여하였다.

 

축성장인(匠人)과 백성에 대한 국왕의 예우

수원화성 축성에는 석수와 목수를 비롯한 22직종의 장인들 1,821명이 참여하였다.  한편 일반 백성들에 대한 강제 부역은 이미 17세기 중반에 사라졌으나 장인에 대한 강제 동원은 18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정조대에 이르러 장인들의 작업 일수를 기준으로 한 노임제가 실시되었다.  비로소 전문 기술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인에 대한 정조의 예우는 실로 파격적이었다.  장인들과 일꾼들인 모군(募軍)에게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여러 물품들을 내려주었는데 더위 먹은 사람을 위한 척서단을 비롯한 환약이나 털모자와 솜옷을 하사하였다.  특히 털모자는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평민들이 감히 쓸 수 없었지만 국왕이 직접 하사한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또한 더위나 가뭄이 극심할 때 공사를 중지시켰고 때때로 음식을 나누어주어 일꾼들을 위로하는 호궤(犒饋)를 실시하였다.  수원화성이 계획보다 빨리 축성되고 가장 뛰어난 성곽이 되었던 것은 정조의 파격적인 배려와 예우, 그리고 일한 만큼 수당을 받는 성과급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의성과 실용성이 가미되어 완성된 수원화성

수원화성이 기존의 한국 성곽들과 가장 차별화된 것은 벽돌의 사용이다.  『어제성화주략』에도 조선에서의 벽돌 사용이 어렵다는 대목이 나오며 이전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은 재료였다. 기본적으로 한국 성곽은 석재 사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실학자들은 벽돌의 효용성을 주장했으며 수원화성의 성벽은 석재로, 중요한 시설물에는 벽돌을 혼용하였다.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성벽 축성법도 변화를 이루었는데 특히 수원화성의 성벽은 18세기 서양의 화포에 대비하여 돌을 정방형으로 다듬고 맞추어 돌끼리의 마찰력을 높였다.  그리고 산성에 비해 방어력이 부족한 읍성의 한계를 넘기 위해 조선시대 읍성 중 가장 많은 방어시설물을 갖추었다.  이전의 한국 성곽에서는 보기 힘든 시설물들은 성곽의 방어력과 함께 미려함마저 갖추었다.  특히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누각과 옹성을 갖추어 한양도성을 압도할 만큼의 규모와 외형을 지녔고 양옆에는 적대(敵臺)라는 시설이 만들어져 성문 방어를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화서문과 창룡문도 옹성을 갖추어 위엄을 더하였다.

 

02.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이미지투데이      03. 벽돌로 만들어진 3층 건물 포루 수된 화성박물관

04. 수원화성의 성벽은 석재로, 중요한 시설물에는 벽돌을 혼용하였다.

 

5.7km에 이르는 수원화성의 요처에 위치한 각루(角樓), 대포를 쏘는 3층 구조의 포루(砲樓), 쇠뇌를 쏠 수 있는 노대(弩臺), 성벽을 돌출시켜 사각지대를 없애는 치성(雉城), 치 위에 누각이 지어진 포루(舖樓), 성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수원천에 만들어진 석교(石橋)이자 수문(水門), 군사 지휘와 훈련을 겸하는 장대(將臺), 성곽 적재적소 에 배치된 암문(暗門), 한국의 봉수(烽燧) 중에서 유일하게 성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벽돌로만 만들어진 봉돈(烽墩)까지 어느 것 하나 고심하지 않은 시설물이 없다.  그리고 특히 군사방어시설 중 가장 독특한 공심돈(空心墩)은 오직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으며 성벽과 시설물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현안(懸眼)은 그 자체로도 기능성과 조형미를 더한다.

 

이처럼 견고한 방어시설과 함께 그 어떤 성곽보다도 뛰어난 조형미를 지닌 수원화성은 정조의 개혁정신과 실학자들의 창의성,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고자 했던 화성유수부 백성들의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한국성곽 건축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조성우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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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