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적군파 赤軍派를 아십니까?
1. 개요
일본 신좌파 도시 게릴라, 테러리스트
정식명칭 :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
2. 발단
1970년의 안보투쟁을 위해 1969년 결성되었다. 일본 공산주의자동맹(공산동)의 극좌파들이 '혁명전쟁을 위한 군대'를 외치면서 공산당 적군파로 등장한 것이 그 시작이다.
"혁명에는 군사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며, '혁명전쟁' 수행으로 혁명을 쟁취한다"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분파다. 모체는 일본 관서지방의 "칸사이 분트"다. 대외적으로는 1969년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전국 전학공투회의 집회에서 처음 등장하며 '봉기관철, 전쟁승리'를 기치로 내세웠다.
테러리즘을 통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전세계 혁명을 달성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걸고 무차별적인 공격에 가담했다. 타 파벌과의 구분은 붉은색에 흰 글자로 '赤軍'이라 씌어진 헬멧으로 구분되었다.
비슷한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공산주의 돌격대를 형성할 것을 주장하는 전기파(戦旗派)와 대립했고 적군파의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최우파에 속하는 반기파(叛旗派)와 정황파(情況派)와도 대립했다.
사상은 주로 마르크스주의, 볼셰비즘, 레닌주의였다고 한다.
3. 이념과 활동
적군파의 주요이론은 일본에서의 혁명을 완수하고, 세계혁명의 사령부로 기능하기 위해 당과 군대를 형성하고 세계혁명의 최고 사령부인 혁명일본과 혁명의 적 총본산인 제국 미국 사이에서 "환태평양 혁명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의 적군파 "전쟁 선언"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까지 타겟에 넣는 패기 그런데 다소 황당한 점은 이 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주범인 이시하라 간지의 "세계 최종전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대동아공영권과 귀축영미의 좌파버전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여튼 그 실현을 위해 PBM전략이 수립되었다.
1969년, 오사카와 도쿄에서 일련의 파출소 습격을 감행하는데, 이들은 이를 "오사카 전쟁"과 "도쿄 전쟁"이라고 칭했다. 이는 일종의 도시 게릴라 전술의 일환이었다. 1970년 2월 22일에는 치바현의 우체국을 털면서 M작전을 개시했다.
"적군 버전 군사혁명도 일어날 수 있다"는 발상하에, 일본도, 사제폭탄, 화염병으로 무장한 '군대'로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외딴 산속에서 군사훈련을 감행하다 경찰의 급습으로 습격조 전원이 체포된 것이 매스컴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첫 시작이었다.
1969년 11월 5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대보살 고개 사건"(다이보사츠 고개 사건. 大菩薩峠事件)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적군파는 제대로 군사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중요한 구성원들이 죄다 잡혀가는 바람에 세력이 약화되어 활동불능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애초 당시 환경으로 봤을때 195-60년대에 걸친 이농현상으로 인해 인해 농민 비중도 많지 않았고, 당시 농촌지역의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농촌지역은 선거철때는 확고한 자민당의 표밭이었다.
당연히 마오쩌둥식 전술이 먹힐래야 먹힐리가 없는데 전략을 전혀 수정없이 그대로 대입했으니 망하는게 당연하긴 했다. 위에서 언급된 훈련 캠프의 적발도 농민의 신고로 발각된 것이다.
4. 국제근거지 마련과 요도호 사건
1970년 4월 일본도로 무장한 9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일본 항공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북한행을 요구하는 항공기 납치(일명 요도호 사건)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는 PBM 전술 중 B전술로, 국내에서 불법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해외 근거지가 필요하다는 "해외망명 항전론", "국제 근거지론"에 따른 것이다.
물론, 북한이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적의 적"이기 때문이고 "가까운 반미국가"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진하게도 북한에 가서 자기들 방식대로 북한을 좌경화시키고 북한의 "적군"화를 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하얀 재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주목을 끌다보니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추적당했으며 초대 의장을 비롯한 대다수 간부들은 1970년초까지는 모조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좀 있었는데, 단지 적군파의 멤버라는 이유로 경찰이 집중감시를 하고 있다가, 경범죄(거리에 침을 뱉었다던가)나 도로교통법 위반(무단횡단을 했다던가) 행위만 발각되어도 죄다 이리저리 엮어서 체포하는 일이 꽤 있었다.
쉽게 말해 주의나 가벼운 경고로 끝날 일을 최대한으로 적용해서 체포한 것이다. 이는 미죄체포(微罪逮捕)라는 단어를 낳게 하였다. 당시 언론과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는 "적군죄라는 죄목이 존재한다"라는 비난이 터져나왔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도한 탄압이 이들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씌워주었다는 점이다.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체포를 면한 극소수 간부만이 P 전략에 따라 해외로 도피하여 '적군파 아랍 위원회(아랍 적군)'로 자칭하고 국제 테러리즘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와 합류하고 일본 적군(JRA)으로 독립했다.
5. 연합적군으로 통합 및 아사마 산장 사건
대부분의 간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감되었고 결국 M 작전을 지휘했던 모리 츠네오가 아직 수감되지 않은 멤버들 사이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적군파는 나가타 히로코가 이끄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슬로건을 신봉하는 마오주의자 조직인 '게이힌안보공투(京浜安保共鬪)'(일본 공산당(혁명 좌파) 가나가와 현 위원회)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원래 적군파 내부에도 다양한 전술과 노선이 있었고, 무조건적인 혁명전쟁보다는 위에서 보다시피 도시 게릴라 전술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적군파와 게이힌 안보공투는 어디까지나 다른 집단이었고 카미아카츠카 파출소 습격사건 도중 사망한 멤버의 추도집회를 합동으로 열거나 모리오카 총포점 습격사건에서 혁명좌파가 탈취한 총기를 원조받아 M 전략에 사용하는 등, 어디까지나 다른 조직간의 제휴활동 이상의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1971년 12월, 두 조직의 주류간부들이 통합하고, "연합적군 중앙위원회"를 자칭하게 되었다. '연합적군(連合赤軍)'이 결성된 것이다.
게이힌 안보공투와 합류하면서 모택동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1920년대 마오쩌둥이 제창한 게릴라 전술인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개념을 전술의 뼈대로 삼았으나 그딴게 1970년대 일본에서 먹힐리가 없잖아!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 국민당의 실정으로 인해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가 심했고 상대적으로 무지한 농민들을 포섭하기도 수월했기에 유용했던 전법이었다.
그러니 그 때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1970년대 일본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도농간 빈부격차가 적은 편이였고, 정부에 대한 불만도 딱히 많지 않은 농민과 농촌을 기반삼아 거점을 삼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꿈 속에서나 가능한 망상일뿐이었다.
연합적군은 이제 완전한 무장투쟁파로 거듭났고 그에 따라 산속의 캠프로 활동거점을 옮기게 된다. 그러나 조직으로서 구심점이 없는데다 주의주장이 다른 조직과의 연합은 극심한 내분을 불러왔고 결국 1971년 겨울과 1972년 봄에 걸쳐 산속 잠복지에서 12명의 동지들을 참혹하게 린치, 살인하는 산악 베이스 사건이 터지고 국내 조직은 점점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경찰의 추적에 쫓기던 잔당 5명이 여름 휴양지인 가루이자와 소재 아사마 산장에서 10일간 30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 무장농성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일본 방송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쾌거(?)를 올리는 동시에 일본 국내 좌파운동에 있어서는 하나의 조종(弔鐘)이 되었다.
당시 NHK가 기록한 90%에 달하는 전인미답의 시청률은 영원히 깨지지않을 신화로 남아있다. 또한 사건본부의 형사들이 식사를 거르다가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생중계되면서 그 전까지 '일본에 냄비 없는 집이 있나...?' 면서 무시당하던 컵라면이 전국구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 경찰조직도 이 사건에 주목, 특히 LA 경찰이 SWAT를 창설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적군파의 주력부대는 궤멸했다.
이후 캠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 일부와 수감되어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후에 국외로 출국 또는 탈출하여 일본 적군에 합류한다. 이 시기 이후 연합적군은 해체되고 적군파는 분열상태에 빠지게 된다.
6. 이후 행보
6.1.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프롤레타리아 혁명파)
연합적군사건 후 적군파는 격렬한 내부논쟁 끝에 분열하게 된다. 주류가 된 그룹은 수감중이었던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시오미 타카야는 1970년 3월 15일에 체포되어 계속 감옥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74년 7월,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중심으로 적군파 재건을 위해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프롤레타리아 혁명파)" 를 결성하게 된다. 적군파는 이렇게 미약한 명맥을 이어가는가 싶더니 1970년대 말 시오미 타카야가 조직 지도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유로 탈당하게 된다.
그런 뒤 시오미 타카야의 독선적인 조직 운영에 반발한 시마네 대학 그룹을 중심으로 주로 도쿄의 산야 지역의 요세바(寄せ場, 일용직 노동자 숙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활동이 적어지면서 자연히 소멸했다고 한다. 옛 멤버의 일부는 여전히 산야에서 NPO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6.2. 일본 적군
일본 적군(JRA)은 1971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무대를 옮겨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이스라엘 텔 아비브 공항 습격사건(1972),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1973),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사건(1974),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1974),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사건(1974), 콸라룸푸르 주재 일본 대사관 습격사건(1975), 다카 사건(1977) 등을 일으켰다.
최고간부중 하나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2000년 11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시게노부는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적군파 대원 3명이 주 네덜란드 프랑스 대사관을 점거,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대원을 석방시킨 1974년의 헤이그 사건 등 국제테러를 주도한 혐의로 국제수배중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JRA에 의한 테러리즘은 사라지는 듯했지만 1987년에 발생한 로마 주재 영국 대사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필두로 JRA가 관여한 테러리즘은 간간히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과 유럽 각국의 테러 방지 공조체제가 확립되고 다른 조직과의 연계가 점점 약해지면서 일본적군의 활동은 점점 미미해졌다. 결정적으로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결되자 극좌사상 자체가 완전히 구식이 되어 새로운 지지자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조직의 중심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이스라엘 및 서방국가와 대립하는 각국의 반정부 조직들과의 자금협력과 활동제휴가 끊기게 되자 1990년대부터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결국 일본적군은 2001년 4월, 최고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해산을 선언, 이후 정식으로 해산했다.
이후 일본적군의 전 리더들이 정부보조금을 받고 생활한다는 소식이나, 일본적군의 멤버 중 한명인 야마모토 마리코가 도쿄 이타바시구의 슈퍼마켓에서 오징어 2마리와 12,000엔을 훔치다 구속된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7. 평가
일단 총포점 약탈, 은행 강도짓과 같은 각종 범죄 행각과 산악 베이스 사건 등의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자행된 살인극, 이를 주도한 천하의 개쌍놈들인 지도부 모리 츠네오와 나가타 히로코가 한 짓거리나 증언으로 남아 있는 온갖 자기합리화의 개소리 등등 까놓고 말해 범죄조직이다.
제일 압권인 것은, 저 모리&나가타 커플이 체포되었을 때 나가타가 취조 받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도쿄에 지금 대사건(자신들이 잡힘으로써 무장봉기라도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모양.) 일어나고 있지 않음?" 이었다. 뭔 소리냐는 경찰에게 등신이라고 쏘아붙인 건 덤.
그나마 모리 츠네오는 뒤늦게나마 이에 대해 자아비판을 한 유서를 남긴 채 자살했지만 나가타 히로코는 살인 행각을 혁명운동 자체의 탓으로 돌리면서 연합적군 사건이나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당이 일으키는 학살사건이나 별 차이가 없다며 전혀 반성하지 않고 살다 죽었다.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면회를 온 관계자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다. 살아서 다시 한번 싸우고 싶다 생각하는 게 마음의 버팀목" 이라고 했다 한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죄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이쯤 되면 훌륭한 소시오패스다.
결국 모리 츠네오와 대비되어 똑같이 잔혹한 짓거리를 했으면서 반성은 커녕 변명에나 급급한 모습 때문에, 일본의 작가 마루오 스에히로(丸尾末廣)가 무잔에(無慘繪,むざんえ) 계열 우키요에 작품선 "新英名二十八衆句" 에서 풍자하는 우키요에를 그려서 깔 정도로 구제할 길이 없는 미친 쌍년 이미지로 굳어 버렸다.
일본 적군이라고 상태가 나은 건 아니라서 위의 텔아비브 공항의 학살자 중 살아서 체포된 오카모토 고조란 인간 쓰레기는 법정에서 "우리 적군파 병사 셋은 죽어서 오리온자리가 되기를 빌었습니다. 우리가 죽인 모든 사람들 역시 같은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일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혁명이 계속되면 별의 수가 얼마나 더 늘어날까요!" 이 따위 소리나 지껄였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주요 범죄자 격인 모리, 나가타, 오카모토 등이 딱히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고 감정도 없는 사이코패스였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쉴드를 치자면 일단 혁명에 대한 열망과 의도만큼은 참으로 순수하고 좋았지만, 본인들의 생각은 물론 혁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랍시고 생각해 낸 것도 정상과 너무나 동떨어졌으며 본인들이 틀렸을 지도 모른단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게 문제.
물론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고 해도, 남녀 가리지도 않고 동료들을 때려 죽이거나 죄도 없는 민간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폭탄을 던진 것이 희대의 또라이짓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자기합리화만 해 대는 나가타나 오카모토 같은 것들은 골백번을 까여도 할 말이 없다. 그럼 모리 츠네오나 반도 쿠니오 같은 사람들은 대체 뭐가 되나.
이 적군파의 테러활동때문에 일본의 진보계열 정치단체들이 패망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의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일본 진보정당이 패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일본 사회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물론 적군파때문에 일본의 좌익운동/학생운동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뭐 좀 하려고만 하면 "과격파 아니냐", "과격노선 아니냐", "민심이 이반할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자기규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진보정당 패망이 적군파 어그로 이후인지, 아니면 1990년대 사회당 지지율 하락부터인지의 문제는 사실 진보정치운동의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다. 적군파때문이라고 하면 극좌적 모험주의가 문제인 것이고, 사회당 몰락은 이와는 반대로 수정주의와 타협으로 인한 변별력 및 동력상실이 문제가 된 것이디.
따라서 이 두 의견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는 이 논쟁에서 답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게 낫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전공투 시대에 파생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일본 적군, 연합 적군을 뭉뚱그려서 적군파로 칭하는데, 이 단체들이 사실상 어떻게든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다른 단체다.
적군파가 모체가 되었고 여기서 나와서 따로 국제혁명전쟁을 수행하려는 집단이 일본적군이고, 적군파의 군사조직인 중앙군과 혁명좌파의 인민혁명군이 통합된 것이 연합적군인 것. 일본에서 적군파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를 지칭하는 것이고 나머지 두 단체는 따로 분류한다. 아마도 요도호 사건의 주범이 적군파였기 때문에, 이후 파생된 조직들까지 뭉뚱그려서 적군파라고 칭하는 듯하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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