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 본산 순천 선암사

조계산의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송광사와는 반대로 선암사는 동쪽 기슭에 있는
천년고찰로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사찰로 명성이 높았고, 필자도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사찰이었다.

특히,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선암사'는 사찰에 문외한 이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이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이 시를 읽어보면 도대체 이 양반은 왜 선암사에 가서 울어야 했는지..?                                       선암사 해우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등등의 여러가지가 보고싶은지라..

일주문의 건립 연대는 1540년(중종 35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보이며, 단층 맞배지붕 형식으로 지은 다포계 건물이다.
지형을 감안하여 돌계단 위에 올려져 있고, 양쪽으로는 담장이 연결되어 있다.
입구 현판에는 '조계산선암사'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후면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天寺)라는 옛 이름이 씌여져 있다.


선암사가 가진 기록에 따르면 선암사는 순천 조계산 동편에 있는 고찰로 벡제 성왕
5년(527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고 해천사(海天寺)로 이름지었으며, 그 후
신라 헌강왕 5년(875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고,
선암사라고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이것들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으며, 의천이 주석하면서 태고종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 상태였던 것을 현종 1년(1660년)에 중건하였으며, 영조 때
화재로 또 다시 폐사되었다가, 숙종 때 호암대사가, 그리고 순조 24년(1824년)에
해붕(海鵬) 스님이 잇달아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때는 불각 9동, 요사(寮舍) 25동, 누문(樓門) 31동 등 65동의 대가람을 이루었지만,
6.25 전란으로 많이 소실이 되고, 현재는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太古宗)에서는 유일한 총림(叢林)으로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 마디로 큰 절이다.

승선교는 일정한 크기로 깎은 마름모꼴의 화강암을 아치(Arch)형 디자인으로 쌓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서 만든 다리로, 홍예교 라고도 부른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했고, 순조 25년(1825) 해붕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길이 14m, 높이 7m, 폭이 3.5m에 이르며,
1963년에 보물 제 400호로 지정되었다.


만세루의 전면에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씌여진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고,
여기서 '육조'라 함은 육조혜능 스님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육조혜능의 선풍을
이어받은 가장 오래된 선종의 도량이라는 의미 일것이다.
이 현판의 글씨는 '구운몽'(九雲夢)의 저자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아버지로,
병자호란 때 강화성을 지키다가 자결한 김익겸(金益兼)이 1636년에 썼다고 전해지며,
이 현판 하나로도 선암사가 얼마나 오래된 사찰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라 542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에 의천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60년에 재건을 시작했다. 1701년에 불조전이 완성되었고, 대웅전의 개수 및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중건했고, 1823년 다시 화재가 나자 해붕 등이 중수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팔상전·천불각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3층석탑(보물 제395호)과 승선교(보물 제400호), 대각국사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등이 있다.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542년(신라 진평왕 3)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헌강왕 1)에 도선 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와 함께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고려 선종 9)에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1660년(조선 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이 재건을 시작했고, 1698년(숙종 24)에는 호암 약휴선사가 원통전을 짓고 그 안에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다. 이어 1701년에는 약 30년간에 걸쳐 완성된 불조전에 과거 53불을 비롯한 60여 구의 목조불상을 봉안했으며, 대웅전의 개수 및 선암사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불이 나서 건물들이 소실되자 곧 상월이 중건했고, 1823년 다시 불이 나자 해붕·눌암·월파 대사 등이 중수하여 대규모 가람을 형성했다.

이 절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을 비롯하여 원통전·팔상전·천불각·장경각·강선루 등이 남아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3층석탑 2기(보물 제395호),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보물 제400호), 대각국사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동부도(보물 제1185호),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화산대사사리탑, 순조가 친필로 쓴 '대복전'과 '천인'이라는 편액 등이 있다.




편집부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