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나무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 식물이다. ‘미선’이라는 이름은 ‘꼬리 미(尾)’, ‘부채 선(扇)’을 써서 만든 말이다
한반도에만 피는 봄 미선나무 이야기
봄이 오는 길목, 아직 잎 하나 돋지 않은 앙상한 가지 위에서 꽃이 먼저 핀다. 개나리를 닮았지만 개나리는 아니고, 흰빛이지만 차갑지 않으며,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향기는 또 어떤가. 한번 맡으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그윽한 냄새. 이 나무의 이름은 미선나무다.

00.미선나무 Ⓒ한국저작권위원회
미선나무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 식물이다. ‘미선’이라는 이름은 ‘꼬리 미(尾)’, ‘부채 선(扇)’을 써서 만든 말이다. 미선은 윗부분이 하트 모양인 부채로 사극 속 임금 뒤의 시녀들이 들고 있는 부채를 떠올리면 된다. 미선나무의 열매가 바로 그 부채를 똑 닮았다. 작은 열매 하나에 왕실의 의장이 담겨 있다니, 이 나무가 새삼 남다르게 보인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름 뒤에는 아픈 역사도 숨어 있다. 미선나무는 1917년 정태현 박사가 처음 발견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그늘 속에서 그 발견은 온전히 기록되지 못했다. 1919년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가 학계에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학명의 명명자는 그의 이름을 따라 ‘Abeliophyllum distichum Nakai’로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부채나무’라고 불렀지만, 그럼에도 우리 선조들은 끝까지 ‘미선나무’라는 이름을 지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01.미선나무 열매(좌) Ⓒ박상진 02.미선부채(우) Ⓒ국립민속박물관
미선나무가 자연유산으로서 더욱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희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대상이 미선나무 ‘몇 그루’가 아니라 이 나무가 살아온 자생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선나무가 자라는 곳은 대개 돌이 많고 경사가 가파른 곳,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버텨야 하는 척박한 자리다. 얼핏 보면 약점처럼 보이지만, 경쟁이 적은 그 틈에서 미선나무는 조용히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 그것이 미선나무가 수백 년을 살아온 방식이다.
현재 미선나무의 자생지는 부안, 괴산(율지리·송덕리·추점리), 영동(매천리) 등 다섯 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서로 다른 풍경을 지닌 곳들이지만, 모두 미선나무가 버텨온 시간이 남아 있는 자리이다. 미선나무의 꽃말은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고 한다. 발견의 공을 빼앗기고,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봄소식을 전하는 나무. 이 꽃말은 어쩌면 이 나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03. 괴산 송덕리 미선나무 자생지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 산58번지) Ⓒ국가유산포털
04. 괴산 추점리 미선나무 자생지 (충북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 산144-2번지) Ⓒ국가유산포털
05. 괴산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지리 산19-1번지) Ⓒ국가유산포털
미선나무는 괴산이나 부안 같은 자생지에서 만날 수 있는 봄의 전령사이지만, 천연기념물센터에서는 그 봄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연유산이 이곳에서는 한 걸음 거리 안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센터 야외학습장은 마치 봄의 소식을 모아 놓은 작은 정원 같다. 4월 초, 그 정원에서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미선나무다. 가지 위로 하얗고 그윽한 꽃송이가 조용히 터져 나온다. 이곳의 미선나무는 자생지에서 이어온 혈통을 바탕으로 길러진 후계목이다. 꽃의 아름다움이 감탄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약속이 이곳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미선나무 곁에는 산개나리가 나란히 서 있다. 가지마다 촘촘히 달린 노란 꽃이 햇빛을 한 움큼 쥔 듯 길을 환하게 밝힌다.
그 노란빛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산책로 옆으로 왕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흔히 일본의 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주 신례리의 왕벚나무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듯 왕벚나무 역시 우리 땅에서 자라는 나무다. 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이면 주황빛 노을 아래 꽃잎이 수채화처럼 번진다.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꽃비가 조용히 쏟아진다. 그 순간을 한 번 마주하면 오래도록 잊기 어렵다. 미선나무로 시작해 산개나리의 노란빛을 지나고, 왕벚나무의 꽃비로 번져 간다. 저마다 살아남은 것들이 모여 함께 피워내는 봄. 그래서인지 천연기념물센터에서 만나는 봄의 풍경은 유난히 친숙하게 다가온다. 출처 : 양승아(국가유산청 자연유산정책과 실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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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