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문명의 시작점이자 신성함이 머무는 성소(聖所)다. 숲은 단순한 자연 경관을 넘어 국가의 기틀이 마련된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인간의 사유를 품은 신성한 공간
사적 경주 계림 일대 풍경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김지호
숲은 문명의 시작점이자 신성함이 머무는 성소(聖所)다. 사적 경주 계림은 그 시원의 서사를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는 장소다. 탈해왕 시대, 숲속 나무 끝에 걸린 금궤와 그 아래서 들린 흰 닭의 울음소리는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여기서 숲은 단순한 자연 경관을 넘어 국가의 기틀이 마련된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고대인들에게 숲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수직적 통로였으며, 계림의 울창한 느티나무와 물푸레나무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민족의 정체성이 시작된 그날의 신성한 기운을 오늘날까지 실어 나르고 있다.
01. 보물 정선 필 여산초당도 Ⓒ국가유산포털
02. 경주 계림 향가비.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추모하여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향찰(鄕札)로 표기된
가사와 그에 얽힌유래가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국가유산포털
숲은 세상의 번잡함을 씻어내고 내면의 질서를 세우는 성찰의 장소다. 보물 정선 필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는 숲속에 은거하며 자연의 섭리를 탐구했던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을 보여준다. 숲은 단순히 물리적인 도피처가 아니라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학문의 정수를 닦던 수행의 공간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작은 초당은 자연과 인간이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지점이며, 이곳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는 곧 삶의 도를 깨우치는 경책(警策)이 된다. 숲은 선비들에게 고독을 선물하는 동시에 우주의 이치와 조화를 이루는 대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03, 04. 산수문전 문양 Ⓒ국립중앙박물관
숲은 현실 너머의 이상향을 꿈꾸던 선조들의 미의식이 투영된 예술적 공간이다. 백제인의 벽돌에 새겨진 보물 부여 외리 문양전 일괄 중 ‘산수문전’의 숲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줄기와 어우러져 신선이 거니는 도교적 이상향을 보여준다. 절제된 선으로 묘사된 나무들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했던 평화로운 안식처를 상징한다. 이런 갈망은 《십장생도 10폭 병풍》에서도 엿보인다. 여기서 숲은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영물들이 노니는 영원한 생명의 무대다. 구름과 바위, 물과 함께 어우러진 울창한 숲의 형상은 죽음과 소멸이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지극한 염원을 담고 있다.
05.불로장생을 염원하는 그림인 십장생도 Ⓒ국립중앙박물관
06. 보물 창덕궁 부용정 Ⓒ국가유산포털
숲은 과거의 유물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지속되는 유산이다. 창덕궁 후원, 명승 담양 소쇄원 등은 조경된 경관으로서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우러져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건축이 숲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숲의 일부가 되는 한국 조경의 정수를 보여준다. 위정자들에게 이런 숲은 휴식과 사유의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인위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질서에 순응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고요한 안식. 숲은 그 가르침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07. 보물 창덕궁 주합루 위에서 본 부용지 전경 Ⓒ국가유산포털
08. 천연기념물 창덕궁 뽕나무 Ⓒ국가유산포털 / 정리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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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