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9

일제 강점기 많이 생산된 녹차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9

일제 강점기 많이 생산된 녹차

찻잎을 따서 바로 덖으면 찻잎이 발효되지않아 찻물이 녹색이 된다. 이러한 차를 녹차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주로 먹는 차는 녹차였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광주의 무등다원, 정읍의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의 보성다원(宝城茶園) 등에서 일본인이 차를 재배하여 녹차를 만들었다. 이때 만든 녹차는 수증기로 차잎을 찌는 것이었다. 이 증제녹차가 상품화되어 유통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녹차는 수증기로 찌지 않고 물없이 솥에 덖는다. 이 녹차는 일제강점기 규슈 특정지방의 녹차 만드는 방식을 해방 후 도입한 것인데, 선구자는 일본 규슈의 제다공장에서 다년간 노동자로 일했던 화개의 김복순이었다.

차는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 정도에 따라 불발효차, 반발효차, 완전발효차로 구별한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찻잎을 따서 바로 만들지 않고 상온에 그대로 방치해 두면 색깔이 누렇게 변하는데 이것은 찻잎이 효소에 의해 변하는 것으로 발효라고 한다. 찻잎을 따서 바로 덖으면 찻잎이 발효되지 않아 찻물이 녹색이 된다. 이러한 차를 녹차라고 한다. 불방효차인 녹차를 한·중·일이 공통적으로 즐긴다. 녹차를 만들기 위해 산화효소를 멈추게 하는 방법 중 찌는 경우를 증제차, 덖는 경우를 덖음차, 데치는 경우를 자비차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의 차는 발효차였다. 초의선사 같은 승려,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 같은 양반들이 발효차를 마셨다. 오늘날 전통차는 발효하지 않는 녹차를 의미한다. 전통차가 발효차에서 녹차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크다. 녹차를 많이 마신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주요 차 재배지인 하동 인근 60세 이상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910-1930년에는 덖음녹차 제다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광주의 무등다원, 정읍의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다원(宝城茶園) 등에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로 일본인들에 의해 증제녹차가 만들어져 상품화되어 유통되었다. 일제강점기 녹차에 대한 연구중 하나로 박순희의 연구(「한국 다도에 있어서 일본 녹차의 수용과 정착」,『일어일문학』53, 2012.)가 있다. 이 글은 박순희의 연구와 신문 기사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녹차에 대해 알아본다.

광주의 무등다원은 돗토리현(鳥取県)에서 제다의 경험이 있었던 일본인이 광주 무등산에서 1911년 경부터 1945년 해방까지 운영했던 다원이다. 『경향신문』1964.01.04.「푸른 산속 무등다원」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무등다원은 광주 시가지 동쪽의 무등산 중턱 증심사 입구에 있었다. 무등다원이 생긴 시초는 신라 법흥왕 때로 증심사의 주지가 중국에서 도를 닦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지고 와서 사찰 주변에 뿌린 것이 시작이다. 그 후 야생차로 버려져 왔는데 일제강점기 오자끼(尾崎)라는 일본인이 이곳을 물색하여 15정보의 다원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차를 재배하였다. 이 다원은 상류사회에서 애용하는 작설차를 연간 2000여관씩 생산하고 홍차도 대량 생산하여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수출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해방 후 오자끼는 무등다원을 버리고 갔는데, 동양화가인 허백련이 1946년 다원을 인수하여 다시 정비하였다. 동시에 삼애재단을 만들어 광주농업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허백련은 무등다원을 삼애학원에 상속하여 제자들이 다원을 계속 경영하기를 염원하였다.

정읍의 소천 다원은 1916년경 문을 열어 1923년부터는 품질이 좋은 천원차(川原茶)를 오사카까지 출하했던 다원이다. 보성의 보성다원은 (주)미기관서(尾崎関西)페인트에서 다도 보급에 따른 수요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1937년 무렵 만든 다원이다. 보성다원은 차 생산지의 천연조건을 다 갖추었다. 좋은 차는 지대가 높고 기후가 온화하며 깊은 산골짜기에 안개가 자주 끼는 곳에서 생산된다.


                                 보성녹차밭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생산한 녹차가 발효차 보다 사회의 주목을 받았는데, 녹차가 조선 사회에 정착한 것은 총독부에서 여학교에 다도 교육을 전국적으로 추진한 것의 영향이 크다. 1940년에 이르러 일본은 그들의 정신 문화를 손쉽게 이입 시키겠다는 취지하에 다도 교육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교육으로 한국인들도 일본의 증제녹차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차라고 하면 발효하지 않는 녹차를 떠올리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경영하였던 광주의 무등다원, 정읍의 소천다원, 보성의 보성다원을 한국인들이 인수하여 계속 증제녹차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녹차는 수증기로 찐 증제녹차가 아니라 물 없이 솥에 덖는 녹차가 주류이다. 이 덖은 녹차가 나오기까지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의 차 만드는 제다공장에서 다년간 노동자로 일했던 화개의 김복순 씨의 노력이 있었다.

김복순은 일제강점기 16살 때 재일교포와 결혼해 규슈의 제다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공장은 녹차를 증제 하지 않고 덖어서 만들었다. 거기에서 30세까지 일한 그녀는 해방 시기 남편과 사별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돌아와 조태연과 재혼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차를 재배하고 제조하게 되었다. 1962년 부부는 쌍계사 인근 화개골로 이주하여 국내 최초로 덖음녹차 상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덖은 녹차에 대해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부부는 김복순의 차 맛을 인정하는 화개 인근 스님들과 신도들의 구매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갔다. 1982년에는 특허청에 화개 죽로차로 상표를 등록하고 공장에서 생산하기도 했다. 1970년대를 전후하여 다도를 통한 민족의 정신 문화를 고취해 나가려 했던 일부 지식인들과 차 인들에 의해 한국 전통 다도가 정립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 차라는 이미지가 강한 증제녹차와는 전혀 맛이 다른 김복순의 덖음녹차가 한국 차 인들의 입맛을 매료시켰다. 이 차가 전통차로 이해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다도에 합류했다. 보성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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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