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8

일제 강점기 대량 생산 된 마른 멸치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8

일제 강점기 대량 생산 된 마른 멸치

조선시대부터 멸치는 삶은 것을 말려서 유통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민들이 한반도 해안가에 이주하고 개량된 장비로 많은 멸치를 잡으면서 마른멸치는 대량생산되었다. 경남의 멸치어장은 거제도, 욕지도, 진해만, 남해도, 사랑도, 울산만 등이고, 전남의 멸치어장은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태랑도, 소안도, 흑산도 등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어장은 경남 거제도, 진해만, 욕지도, 사랑도, 거문도, 제주도 등이다. 통영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마른멸치를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통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멸치는 작고 날씬한 생선으로 아래턱이 위턱보다 훨씬 짧다. 등쪽이 암청색, 배쪽이 백색, 측면에 종선이 있다. 비늘이 있는데 잡힐때나 육지에 들어온 후 비늘이 다 벗겨진다. 멸치는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 동, 남, 서해안에서 잡혔다.

                                         마른멸치

조선시대부터 많이 잡힌 것이 문헌자료에서 확인된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고, 마른 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에 의하면 동해안에서 멸치가 방어떼에 쫓겨 몰려올 때는 그 세력이 풍도(風濤)와 같고, 어민이 방어를 어획하기 위하여 큰 그물을 치면 어망 전체가 멸치로 가득 차므로 멸치 가운데서 방어를 가려낸다고 하였다. 또 멸치는 모래톱에서 건조시켜 판매하는데 우천으로 미처 말리지 못하여 부패할 때는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잡은 멸치를 대형 무쇠솥에 넣고 수백도의 불로 삶은 후 모래톱이나 해안가의 둥굴둥굴한 돌인 몽돌밭에 그물을 깔고 말렸다. 자연건조를 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썩을 수 있었고 너무 많은 양이 잡혀도 미처 말리지 못해 썩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전근대적인 어업도구로도 멸치는 이렇게 많이 잡혔던 것이다.

멸치는 6월부터 잡히는데, 종류는 정어리와 고너리가 있다. 정어리는 기름을 짜고 고너리는 기름도 짜지만 말리기도 한다. 정어리는 경남, 강원, 특히 함경북도 해안가에서 많이 잡히고 고너리는 전남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데 우리가 마른 멸치로 먹는 것은 이 고너리이다.(『동아일보』1932.06.03. 「육월중의 조선서 많이 잡힌 고기와 그 산지」)

                                     1932년 6월 3일 육월중의 조선서 많이 잡힌 고기와 그 산지(사진출처:동아일보)

멸치는 동서남해안 모두 나지만 특히 남해안에서 많이 난다. 남해안 중에서도 통영군이 다산지이다. 경남의 멸치어장은 거제도, 욕지도, 진해만, 남해도, 사랑도, 울산만 등이고, 전남의 멸치어장은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태랑도, 소안도, 흑산도 등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어장은 경남 거제도, 진해만, 욕지도, 사랑도, 거문도, 제주도 등이다.

멸치 어업은 재래 조선인보다 일본내지인 업자들이 도래하여 장족의 진보를 보였는데 근일에는 각 지방 어부들이 일본인 어부의 어법을 본받아 상당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내지인 어부가 멸치어업을 목적으로 경상남도 연해에 도래한 시기가 명치22, 23년 경인데 대부분은 애원현, 강산현, 향천현, 산구현인들로 당시 어획총량은 약40만원이었다고 한다. 조선산 멸치는 대부분 쪄서 말린 제품으로 소비된다. (『동아일보』1939.06.21. 「조선중요수산물(18) 멸치(하)」)

일본어부들이 어업활동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대표적인 지역이 통영이었다. 통영의 일본인이 많이 사는 마을에 대해 이 당시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미륵산에는 통영시내에서 먹는 수도의 수원지가 있습니다. 그리 넓지 못한 저수지에 뿌리를 발한 송수관은 봉평리를 거쳐서 바다 속을 뚫고 통영시에 이릅니다. ... 도남리 고개를 넘어서면 태산을 등에 지고 강산촌(岡山村)이 보입니다. 멸치의 집산지로 유명하고 일본인이 많이 살기로 이름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즐비한 기와집이나 정제된 도로의 규모가 섬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어촌입니다. 90여 호나 되는 이곳에서는 조선사람의 집이 20호 미만입니다. 일본사람 중에도 강산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이 이름을 얻은 것이라나요? 물 가운데로 돌출한 언덕에는 신사가 있고 지월교라는 다리가 가설되어 있습니다. 찌는 여름밤 해풍을 쐬며 이 다리를 건너면서 물속에 솟는 달을 구경하는 정취가 있습니다” (『동아일보』1928.07.04. 「도서순례(12) 거제도방면(2)」)

                                   1928년 7월 4일 도서순례(12) 거제도방면(2)(사진출처:동아일보)

일본인들이 조선의 멸치어장에 진출하면서 멸치어획량이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 멸치들은 삶아 말린 후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통영에 살던 일본인들이 유통역할을 하였다. 1908년 통영에 정착한 핫토리 겐지로라는 일본인은 대부업을 통해 대지주가 된 후 미곡상을 하면서 자본을 모았다. 그 자본으로 1913년 주식회사 체제로 개편되는 통영해산물주식회사를 경영하였는데, 이 회사는 통영의 주산품인 멸치 위탁판매를 주로 하면서 통영의 대표적인 회사로 성장하였다. 통영에는 1897년 경부터 멸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통영에는 이때까지 마른 멸치를 판매하는 기관이 없어 어획물은 전부 시모노세키로 보내졌다.

핫토리 겐지로는 통영의 중요 해산업자등과 협의하여 1911년 12월 통영해산물동업조합을 설립하고 도매영업을 하면서 어업자금을 융통하여 어업자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1913년 해산물동업조합을 해산하고 8월 10일 3만엔으로 통영해산물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이 회사에 의해 통영의 해산물(특히 마른 멸치)이 일본 내지, 만주, 상하이까지 직접 거래되었는데 1919년에는 마른 멸치만으로 100만엔 규모의 무역을 하였다. (핫토리 마사타카 엮음, 우정미 옮김, 차철욱 역주 및 해제, 『식민지 조선의 이주 일본인과 통영-핫토리 겐지로』, 국학자료원, 2017.)
자료출처 : 거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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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