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10

일제강점기 시절에 나타난 뻥튀기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10

일제강점기 시절에 나타난 뻥튀기

오늘날 뻥튀기를 만드는 기계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시초이다. 이 기계는 과자장수들에게 ‘7홉이 1말이 된다’라는 문구로 광고하여 판매되었다. 백미, 현미, 수수, 조 등을 15배 이상 팽창시키는데 시간은 3분 걸리고 비용은 5리(厘)가 든다고 하였다. 뻥튀기 기계는 곡물을 쉽게 과자로 만들어주었지만 사고의 위험이 늘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뻥튀기 기계의 사고기사가 종종 보인다. 쌀 5홉으로 뻥튀기를 하면 일반 가정집은 1년 정도 먹을 수 있었다. 1980년대 들어 과자들이 많이 나오면서 뻥튀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뻥튀기’는 기계로 만든다. 기계의 원리는 압력이 걸려 있는 용기에 쌀 등 곡물을 넣고 밀폐시켜 가열하면 용기 속의 압력이 올라가는데, 이때 뚜껑을 갑자기 열면 압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곡식알이 수 배로 부푼다. 용기의 뚜껑을 열면 '뻥'하는 큰 소리가 나므로 뻥튀기라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곡식알은 다공질(多孔質)이 되고, 녹말은 덱스트린으로 변하므로 그대로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 이 기계는 일제강점기에 출현하였다.

『동아일보』 1932년 1월 16일 광고를 보면 ‘실로 놀랬다, 7홉이 1말이 된다’라는 광고문구로 곡물팽창기를 선전하고 있다. 백미, 현미, 수소, 조 등을 15배 이상으로 팽창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3분 걸리고 비용은 5리(厘)가 든다고 하였다. 제조원은 대판(大阪)시 항구 8번 옥원정 1정목으로 죽촌기계제작소가 만들었다고 한다. 즉 일본에서 만든 기계였다.

다른 회사에서 만든 기계도 있는데 역시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다. 『동아일보』1932년 1월 28일 광고를 보면 ‘돈모으기의 제왕’이라는 카피와 함께 5홉의 쌀이 8되로 팽창한다고 하였다. 기계를 만든 곳은 대판(大阪)시 서성구 출성통 5정목 강부(岡部)철공소였다. 이 기계가 오늘날도 많이 먹는 강냉이와 튀밥을 만드는 기계의 원조이다.

                                1932년 2월 29일 신의주 화재 손해 1000원 이상(사진출처:동아일보)

지금도 뻥튀기 기계를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데 이때도 기계의 주요 판매대상은 뻥튀기를 만들어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래서 광고문구도 ‘돈 모으기의 대왕’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곡물팽창기는 화재의 위험이 큰 기계였다. 1932년 2월 26일 오후 7시 50분 경 신의주 부내 상반정 4정목의 과자상을 하던 일본사람의 곡물팽창기에서 불이 튀어나와 마루에 있던 휘발유에 불을 당기어 옆집까지 불이 번져 과자상은 1천원의 손해, 옆집인 목재점은 100원, 대서소는 20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동아일보』1932.02.29. 「신의주 화재 손해 1000원 이상」) 곡물팽창기의 동력원으로 휘발유를 썼는데 이것에 불이 튀면 대화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재가 다음 해에도 또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평안남도 덕천에서였다. 1933년 2월 1일 평안남도 덕천 읍내에서 김화수(24)라는 사람이 자기 상점에서 강냉이를 튀기기 위하여 곡물 팽창기에 휘발유를 넣고 불을 붙였는데 불시에 기계가 폭발되는 바람에 불이 그 곁에 있던 휘발유통에 튀어서 휘발유통이 터졌다. 터진 휘발유가 김화수의 몸에 붙어서 김화수는 중한 화상을 입고 그의 부모도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동아일보』1933.02.04. 「팽창기 폭발 생명이 위독」)

이러한 사고는 1980년대에도 일어났다. 폭발사고시 가장 큰 피해자는 뻥튀기 기계 주인으로, 거의 사망이나 중상을 입었다. 곡물 팽창기가 뜻하지 않는 사고를 일으켰으나 이 기계로 만드는 튀밥은 어린이나 어른들의 좋은 간식 중 하나였다. 고물 장수가 고물을 수집하고 대신 주는 것이 강냉이 등 튀밥이었다.

이 튀밥을 여름 음료에 이용한 기사가 보인다. ‘우리 지방 여름 음식 제법. 찹쌀이나 쌀튀한 것으로. 영유(永柔)읍 k생. 준비물 : 찹쌀 혹은 쌀 5홉, 꿀이나 설탕, 얼음, 연유나 우유. 이상 준비한 것으로 우선 찹쌀을 옥수수튀하는 가게에 가서 5전을 두고 튀하면 5되 5홉가량 불습니다. 이것을 종이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서 주머니를 꼭 동여서 습기 없는 곳에 달어두고 쓸 때 마다 내려서 씁니다. 대개 5홉 튀한 것이면 한해 여름은 갑니다. 갓 길어온 냉수에다가 꿀이나 설탕을 타고 연유 혹은 우유를 뽀얗게 탄 후 잘 저어서 맛을 봅니다. 이 물을 유리그릇에 둔 후에 얼음을 쪼개어 띄우고 찹쌀튀한 것을 위에 띠여서 먹습니다. 손님이 땀을 흘리며 오셨을 때 내놓으면 퍽 환영을 받습니다. 집 아이들은 매일 점심 후에 좋아서 먹습니다.’ (『동아일보』1934.08.10. 「우리지방 여름 음식 제법」)

1980년대 들어 과자들이 많이 나오면서 뻥튀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0여년 간 뻥튀기를 천직으로 알고 1985년 무렵까지 뻥튀기 장수로 일해온 김경섭 씨(72,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는 이 뻥튀기 기계로 자식들을 길렀다고 한다. (『경향신문』1985.12.05. 「뻥튀기 귀를 막아라, ‘뻥’ 골목 동심 부풀린 요술 기계」) 한국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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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