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 火塟(화장)을 하다.

불교에 귀의한 대왕은 불교식으로 다비장을 치르게 하였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품을 줄 아는 대왕이었다. 오늘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나가는데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문무대왕, 火塟을 하다

낭산은 사방으로 명활산, 선도산, 토함산, 소금강산이 감싸고 있는 높이 99.5m의 조그마한 산이다.

신라 실성왕 12년(413) 무렵 부터 神이 살고 있는 神遊林(신유림)이라 불리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절과 왕릉이 산기슭을 따라 줄지어 있다.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사천왕사지, 능지탑, 중생사. 황복사 등이 있다.

이 산 서쪽에 탑재가 흐트러져 있던 것을 다시 복원을 해 놓은 탑이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고 한다. 십이지신상이 남아 있는 2층 형식인데 원래의 형태는 알 수가 없다. 신라 삼산조사단이 1969년부터 여러 차례 조사하여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세우게 되었다.



능지탑 陵只塔   기념물 제34호


능지탑은 원래 기단의 네 변에 십이지신상을 세워 넣고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 탑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발굴 중에 소조불상(흙으로 만든 불상)의 파편과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탑의 네 변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부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면은 흙을 덮어 잔디를 심었다. 기단부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을 방위에 맞게 안 기둥처럼 세웠는데 9구만 남아 있다. 이 중 8구는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앞에 있는 미완성 왕릉에서 옮겨온 것이다. 기단부 위쪽의 탑신부는 기단부와 같은 형태로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위쪽에 굄돌을 한 단 더 올린 점이 기단부와 다르다.

탑의 꼭대기는 사모지붕 모양으로 흙을 쌓아 마감하였다. 현재 탑 주변에는 정비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연꽃 모양을 새긴 돌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으로 성격을 알 수 없는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이내에 왕궁 바깥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능지탑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 또는 능시탑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을 하나 만드는 데는 많은 국가적 재정과 인력이 소모된다. 문무대왕은 이러한 폐단을 잘 알았고, 또 숱한 왜구들의 노략질에 분노했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한 대왕은 불교식으로 다비장을 치르게 하였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품을 줄 아는 대왕이었다.

이 산꼭대기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남쪽으로는 사천왕사, 북쪽 가까운 거리에는 중생사 마애불이 있다. 선덕여왕은 살아생전에 이 산을 수미산이라 했으나 그 뜻을 누구도 알지 못하다가 여왕이 죽자 비로소 수미산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문무대왕도 이 자리에 화장할 것을 주문하였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나가는데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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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