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와 천연기념물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등 개성 관광의 한 코스였던 박연폭포는 예로부터 개성의 명소였다. 지금은 직접 갈 수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남긴 사진, 고려와 조선의 시와 조선의 그림으로 박연폭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조선시대 <박연도>와 천연기념물 ‘박연폭포’

한때는 가능했던 휴전선 이북의 금강산, 개성 명승지 여행은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과 2007년 12월에 시작된 개성 관광도 2008년 11월 모두 중단되었다. 선죽교, 숭양서원 등 개성 관광의 한 코스였던 박연폭포는 예로부터 개성의 명소였다. 지금은 직접 갈 수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남긴 사진, 고려와 조선의 시와 조선의 그림으로 박연폭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01.<박연도(朴淵圖)>, 강세황, 종이에 엷은 색, 32.9×53.5cm, 《송도기행첩(松都起行帖)》 제12면, 1981년 이홍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02.개성 박연폭포 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시원한 물줄기가 돋보이는 박연폭포

개성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박연폭포는 높이 37m, 너비 1.5m 규모이다. 폭포 이름이 박연폭포이므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못을 박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폭포 위쪽에 박처럼 생긴 커다란 못이 있는데, 이를 박연이라고 하며, 가운데 도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폭포 아래쪽 못은 둘레 120m, 지름 40m 정도이며 고모담이라 한다. 고모담에는 용의 머리를 닮은 대룡암이 있으며, 여러 명의 사람이 설 수 있다. 이 바위에 글이 새겨져 있는데, 황진이의 글로 알려져 있다.

개성을 다녀온 관광객이 인터넷에 올린 가로가 긴 방향으로 촬영한 박연폭포 사진을 보면 높이가 주는 위압감보다는 거대한 암벽이 압도적이어서 돌로 쌓은 벽과 같은 단단한 폭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암벽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물줄기는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지고 더 힘차게 쏟아지고 있다. 선인들은 이 물줄기를 ‘은하수’로 표현했다. 고려 말 성리학자 이색은 “은하수가 매달려 뿌리는 거품이 사면으로 흩어지니 큰비 오는 것 같구나”라고 했으며, 조선 15세기 문인 관료 이승소는 “거꾸로 내려 쏟는 은하수 한 갈래 드리웠네”라고 했다.

사진만 봐도 물방울이 부딪히며 쏟아지는 웅장한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선인들은 이를 용의 울음, 천둥소리, 땅 속을 울리는 번개 소리라고 표현했다. 15세기 말 문인 박은은 “한낮 천둥소리에 하늘은 찢기는 듯하다”라고 했다. 폭포의 ‘차가운 기운’도 느껴진다. 이색은 “6월의 무더위도 감히 가까이 못하고, 땀 흐르던 피부에 소름이 끼치어 만져 보게 되는구나”라고 했다. 박연폭포에서는 더위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03.<박연관폭도(朴淵觀瀑圖)>, 작가 모름, 조선 1772년, 종이에 엷은 색, 《송도사장원계회도(松都四壯元契會圖)》

6폭 병풍 중 제3폭 ©국립중앙박물관    04.개성 박연폭포 엽서 ©부산박물관 소장

05.<박연도(朴淵圖)>, 윤제홍, 조선 1812년경, 종이에 엷은 색, 26.2×48.0cm, 《학산묵희첩》 제20면 ©국립중앙박물관



박연폭포를 실감나게 표현한 강세황의 [박연폭포도]

많은 사람의 시상을 자극해 지어진 박연폭포 시가 고려시대부터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박연폭포를 그린 [박연도(朴淵圖)]가 15세기에도 제작되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명신 이항복(李恒福)이 박연도를 보고 쓴 시에 따르면,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박연폭포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실제 전하는 그림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실존하는 박연폭포 그림 중 경관을 가장 잘 반영한 그림은 조선 18세기 문인화가 강세황이 그린 [박연도]이다. 강세황은 가로로 긴 종이에 먹과 엷은 채색으로 박연폭포 주변의 경물 하나하나를 화폭에 옮겼다. 박연에 있는 바위를 지나 흐르는 물줄기 주변의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인 모습과 그 사이에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를 담백하게 그림으로 옮겼다. 암벽과 산, 나무는 갈색과 녹색 계열의 맑고 엷은 채색을 이용해 여름철의 물기를 머금은 바위와 푸른 산의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

폭포 주변 경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박연 오른쪽에 길쭉하게 둥근 바위가 모여 있고, 바위 아래쪽에 대흥산성 북문인 성거관 문루가 있다. 문루에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정자가 보이는데, 박연폭포를 조망하는 범사정이다. 20세기 전반 유리원판 사진과 비교하면 박연과 성거관의 위치가 차이가 나지만, 강세황이 실제 지형적 특성을 토대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의 박연폭포는 맑고 깔끔하면서 단정한 인상을 주어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박연폭포의 개성과 본질을 담은 그림

박연을 세로로 긴 화면으로 담은 그림이 있는데, 1612년 그림을 1772년에 다시 그린 [송도사장원계회도 6폭병풍] 중 한 폭이다. 이 병풍 제3폭인 [박연관폭도(朴淵觀瀑圖)]는 대흥산성 성곽이 보이는 위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박연에서 물보라 일으키다가 천길 아래로 떨어져 고모담에서 바위에 부딪혀 포말이 세게 이는 경관을 담았다. 폭포 암벽의 너비를 축소해 폭포 물줄기보다는 주변 산세가 더 강조되어 강세황 그림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폭포를 세로로 길게 촬영한 20세기 초 사진과 폭포 부분을 비교하면, 이러한 구도로 포착한 박연폭포의 개성과 특징을 잘 살렸음을 알 수 있다. 폭포 앞쪽에 범사정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서 병풍 위쪽에 적힌 ‘박연관폭’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범사정에서의 폭포를 바라보며 즐겼던 경험을 부각하려는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문인화가 윤제홍이 1812년에 그린 파란색 종이에 먹으로 그린 박연도와 그의 글이 《학산묵희첩(鶴山墨戱帖)》에 수록되어 있다. 그림 좌측면에 큰 글씨로 자신감 넘치게 “폭포는 박공(朴公)의 못으로 떨어지고 사람은 범사정에 머문다”라고 썼다. 글의 내용대로 범사정에서 두 인물이 한가롭게 폭포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암벽의 폭이 좁아져 폭포는 더 높게 보인다.

박연의 바위, 고모담의 바위, 암벽의 각이 진 모습, 범사정 등 박연 폭포의 기본 요소를 모두 표현했다. 윤제홍은 박연의 기본 구성 요소를 다 표현했지만, 실제 경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인상을 강조했다. 이처럼 실경을 그린 그림은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의 개성과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정서적 의미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갈 수 없는 명소가 된 박연폭포

이처럼 박연폭포는 문학과 그림으로 기록될 정도의 명소로, 조선시대 개성의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3대 폭포가 되었다. 3대 폭포를 어떤 기준으로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인지도 측면에서는 박연폭포는 선정될 만하다. 명소가 되기 위해서는 편리한 접근성도 중요한데, 박연폭포는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17세기 문인 김창협은 강화도나 황해도 다른 곳을 들르면서 박연폭포를 세 차례나 방문했을 정도로 자주 찾았다. 21세기 서울에서 차로 2시간 내로 박연폭포에 갈 수 있지만, 이제는 갈 수 없다. 언젠가는 무념무상으로 박연폭포를 바라보는 ‘폭멍’을 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출처 /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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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