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국 궁궐안에 지은 이또 히로부미 사당

일제가 한국 궁궐안에 지은 이또 히로부미 사당

 

탕 ! 탕 ! 탕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황천길로 보낸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탕 ! 탕 ! 탕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황천길로 보낸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안중근 의사는 일제가 행한 조사과정에서 그를 용서 할 수 없는大죄인으로 진술했다.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 등 15가지 조항으로 그를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규정하였다.그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이름을 바꾼 후 신정부에 참여했다. 1885년 내각(内閣) 제도가 창설된 후,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 되었고,1,5,7,10대 총리를 역임한 일본의 영웅이었다. 이러한 영웅을 일제강점기 일본이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하겠다고 만든 <박문사>! 정문으로 쓰인 경희궁 홍화문 사진 

 

남의 나라 궁궐 대문을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넋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한 일제 ! 한민족을 능욕하듯 지금의 장춘단 공원 자리에이 문을 옮겨 세웠고, 1932년 박문사를 완공했다. <박문사>란 명칭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우 히로부미의 이름에서 따와 지었다. <장춘단 공원>은 고종에게는 특별한 장소였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 전사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일제는 1919년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고 제사를 못 지내게 했다. 결국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당인 박문사를 만들었다. <박문사> 설립은 이토우 히로부미의 훈업을 후세에 전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빼내어 가져다 썼다. 또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까지   떼어  정문으로 삼았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철저한 문화재 파괴였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일왕과 그 일가들의 하사품도 전해졌었다. 일제는 이 박문사의 잔디를 고르고 관리하는데 상기의 사진과 같이 주로 조선 아녀자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켰다. 이 사당은 대한민국 건국시 허물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이토우 히로부미 伊藤博文 묘는 가히 성역화 되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묘지주소〒140-0015 東京都品川区西大井6-10-18https://shinagawa-kanko.or.jp/spot/itouhirobumikum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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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