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 , 궁남지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봉래(蓬萊)·방장·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따라서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宮苑池)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궁남지는 1965년∼1967년에 연못 바닥을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에 흙을 쌓고서, 수양버들을 심어 조성하였다. 전체 면적은 13,000평 정도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원래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1993년, 1995년에 발굴조사가 시행되어 궁남지 내부 및 주변에서 나무 및 차지고 끈끈한 흙인 점질층으로 만들어진 집수시설, 수로,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다. 집수시설은 동서 길이 11.65m, 남북 너비 3.13m인데, 가장자리를 따라 통나무를 2중으로 박아 벽체로 쌓은 모습이다. 집수시설과 가까운 동쪽 바깥쪽에는 도수로가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을 거쳐 집수시설로 물을 끌어드리도록 하였다. 집수시설 안의 서쪽 부분은 6.3m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고, 동쪽 부분에는 수로에서 유입된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얕은 ‘∪’자형 홈이 나 있다. 수로는 인공물을 설치하지 않은 자연형 수로와 옆면에 말목을 박고 나무를 횡으로 걸친 인공형 수로가 연결된 모습이다.

수로에서는 “서부후항사달사사정의활□□□정귀인중구사하구이매라성법리원수전오형(西部後巷巳達巳斯丁依活□□□丁歸人中口四下口二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 “서부중부이(西部中部夷)”로 판독되는 백제 목간 1점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길이 35㎝로 소나무로 제작되었는데,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확인되는 영조척(營造尺)이 35.05㎝인 것과 부합하여, 백제 도량형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목간에 ‘서부후항(西部後巷)’과 ‘중구(中口)’, ‘하구(下口)’ 등의 행정구역명이 기록되어 있어, 문헌에서만 확인되었던 ‘후항’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5부와 5항을 두었다는 백제 행정체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수로 안에서는 여러 점의 나무 삽과 가래, 베틀의 구성품인 목제 비경이, 부들로 제작된 짚신, 사람의 족적(足跡) 등 당시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궁원지(宮苑池)로, 조성 기록이 명확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궁남지의 조경기술은『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궁남지는 규모와 정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촬영 : 편집부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이다.

백제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 스며있는 궁남지는 넓이가 38만평방이나 되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포룡정 이라고 씌여진 정자가 떠있고, 그 주변에는 휘늘어진 능수버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일본의 아스카문화를 열었던 백제인들의 숨결과 얼이 깃들어진 이곳 궁남지에는 천만송이나 되는 연꽃들, 홍련, 백련, 가시련, 황금련, 수련, 등등의 50여종의종류가 궁남지 일대에 서식하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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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