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흥덕왕 (新羅 興德王)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봉했으며 불교를 신봉해 이를 진흥했다. 827년 (훙덕왕2년) 고구려의 승려인 丘德(구덕)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지고 오자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신라 흥덕왕 (新羅 興德王)

신라 제 42대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의 3남으로 제39대 소성왕과 제 41대 헌덕왕의 아우이며, 제 40대 애장왕의 숙부가 된다. 헌덕왕 때인 819년에 김승빈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822년에 副君으로 봉해지고 월지궁으로 들어간다. 826년 (헌덕왕18)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헌덕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김수종(흥덕왕)을 태자로 삼았다.

흥덕왕은 대아찬 김우징(제 45대 신무왕)을 시중으로 삼고, 당나라에서 徐州의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돌아온 장보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청해진을 지키게 했다.

828년 12월에 김대렴을 당나라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는 귀국할 때 차의 종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여 이때부터 차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흥덕왕의 재위 동안 신라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잇달아 일어났다. 5월에 때아닌 서리가 내리고 가뭄도 극심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눈이 석 자가 내렸다. 그리고 금성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봄 여름 내내 타는 가뭄으로 땅이 검붉게 탔다고 한다. 그래서 흥덕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또한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하지만 지독한 흉년이 닥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왕은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833년에도 온 나라에 극심한 기근이 일어났고 겨울에는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이렇듯 잇따른 흉년과 기근으로 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자 흥덕왕은 서형산에서 군대를 사열했으며 직접 남쪽으로 주와 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을 남녀로 구분해 의복과 장신구 등의 복식을 법령으로 정해서 사치를 금하게 했다.

한편,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봉했으며 불교를 신봉해 이를 진흥했다. 827년 (훙덕왕2년) 고구려의 승려인 丘德(구덕)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지고 오자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830년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기도를 하고 150명에게 승려의 도첩을 주었다.

흥덕왕은 즉위하고 2개월 만에 왕비인 장화부인이 먼저 눈을 감았고 정목왕후라고 하였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이었다. 왕이 왕비를 생각하며 잊지 못하고 슬퍼하여 즐거워하는 일이 없자, 군신들이 표를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릂 '외짝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기를,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는 어떠하겠는가.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바로 다시 아내를 얻겠는가.'라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또 시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좌우의 시자로는 오직 환관만 두었다.

흥덕왕은 836년(훙덕왕11년) 12월에 눈을 감았으며 유언에 따라 왕비인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되었다. 왕릉 주변에서 흥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신라의 왕릉으로서는 드물게 피장자의 신원이 확인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의 능이 안강 북쪽의 비화양에 았으며 왕비 昌花(창화)와 합장되었다고 기록했다.
흥덕왕이 왕위를 이을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그의 사촌인 상대등 김균정과 또 다른 사촌인 김헌정의 아들 김제륭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김제륭을 지지했고, 김우징, 김예징, 김양 등은 김균정을 지지했다. 두 세력은 궁궐을 장악하려고 서로 싸웠고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승리하면서 제43대 희강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흥덕왕 때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앵무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암컷이 죽자 수컷은 슬퍼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흥덕왕은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하였다. 수컷은 거울을 보고는 짝을 얻은 줄 알고 쪼다가 이때 자기 모습이 비친 것임을 알고는 슬피 울다가 죽었다. 흥덕왕은 이를 노래로 지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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