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차이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유산 창덕궁 vs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베르사유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가 저물어 갈 무렵, 지루하게 반복되는 기하학과 좌우대칭에 피곤해진 유럽인들은 새로운 정원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관의 차이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유산 창덕궁 vs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베르사유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가 저물어 갈 무렵, 지루하게 반복되는 기하학과 좌우대칭에 피곤해진 유럽인들은 새로운 정원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지 막막했다. 그때 저 멀리 동양에 가면 사라와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찾아야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라와지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중국말이라고도 했다. 오로지 정형성 하나로 일관해 왔던 그들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때 그들이 창덕궁을 찾아왔더라면 어땠을까?


*창덕궁 전경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으며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정궁 역할을 해 왔다.

**베르사유 궁전 전경 바로크 건축의 대표 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 분수 그리고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여러 전각의 조화로움이 매력인 창덕궁

돈화문으로 입장해 조금 걷다가 오른쪽에 나타나는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통과한 뒤, 이번엔 왼쪽으로 틀어 인정문을 지나 근엄한 인정전 앞에 서서 옷깃을 여밀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선정전, 희정당을 본 뒤 낙선재로 갔다가 돌담길 사이를 걸어올라 후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만약 가을이라면 좌우 담장 너머로 가지를 높이 뻗은 붉은 단풍 사이를 걷게 될 것이다. 후원에서 그들은 우선 연꽃 가득한 부용지와 언덕에 높이 자리한 채 연못을 내려다보는 주합루 그리고 서향각, 영화당과 부용정의 여러 전각이 빚어내는 조화로움에 말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다시 걸음을 옮겨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다가 불로문을 통과하면 애련지와 애련정의 아득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좁아지는 골짜기와 깊어지는 숲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거닐며 문득 관람지를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옥류천의 별세계로 나가게 될 것이다. 거기서 길을 돌아 내려오면서 이것이 혹시 사라와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돈화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입장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스러운 풍경의 품에 포근하게 안기는 것이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다시 체험하고 싶을테니까.


01.베르사유 궁전정원 분수대 ⓒ셔터스톡     02.창덕궁 애련정 ⓒ셔터스톡



자연을 대하는 세계관의 차이,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과 창덕궁을 비교하는 것은 둘 다 세계유산이니 누가 더 잘났나 한번 겨뤄보자는 뜻이 아니다. 문화는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가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흥미롭다. 동서 문화가 서로 크게 다른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그중 자연관의 차이, 정확히 말하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개념의 차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다시금 종교에 기인한다. 서구인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유일신이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한 뒤 인간에게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책임을 맡겼다고 믿었다. 그러니 사람이 만물 위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자연의 이치에 귀를 기울인 점은 같지만, 순응한 것이 아니라 통제했다.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수학과 기하학으로 풀어낸 뒤 그에 맞추어 모든 것을 나란히 정돈했다. 필요하면 자연의 이치를 인간의 뜻에 맞게 개조하는 데 서슴없었다. 정원에서 그 예를 찾자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분수가 대표적일 것이다. 한창때 총 1,400개의 분수가 있었던 베르사유 정원에서 우리는 그 극치와 만나게 된다.


조경가 르노트르, 왕의 명령을 받들다

베르사유 궁전은 폭 415m의 장엄한 건물이다. 창덕궁 수십 채의 전각과 그 기능을 하나의 건물에 다 몰아넣은 것이다. 정원도 마찬가지여서 단 하나의 거대한 공간으로 구성했다. 이는 왕이 온 세상을 한손에 틀어쥐고 호령했음을 뜻한다.

베르사유 궁전을 통과해 정원 쪽으로 나가면 광대한 이중 테라스가 나타난다. 테라스가 차지하는 면적만 해도 어지간한 공원의 크기이다. 바로크 정원 개념 중에 파르테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한 칸, 두 칸 하는 식의 공간 단위와 맞먹는 것으로서 정원 구성의 기본 단위였다. 그 한 칸이 마루가 되고 침실이 되고 서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파르테르는 때로는 연못이고 때로는 잔디밭 또는 꽃밭이었으며 회양목이나 주목 문양으로 채우기도 했다. 이 사각형의파르테르들이 음악의 대위법처럼 화성을 이루며 전개되는 것이 바로크 정원의 작법이다.

베르사유의 조경가 르노트르가 완성한 이 작법은 테라스에서 이미 시작되어 물 파르테르(연못)와 주목 문양 파르테르로 구성되었다. 이 테라스 끝에 서면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일단 넓고 반듯한 수면이 눈에 들어온다. 식물은 정원을 구성하는 녹색의 건축 소재로 이해되었다. 75,000여 그루의 수목을 수면의 양쪽에 나누어 심었으나 모두 키순으로 나란히 정렬하거나, 피라미드 모양으로 다듬어 세우거나 또는 높은 녹색의 벽을만들어 좌우대칭으로 세웠다. 녹색 기하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정원의 주역은 물의 축이다. 가로세로 십자로 이루어진 물의 축은 세로 약 1.5km, 가로 약 1km 규모이다. 궁전에서 정원의 가장 낮은 곳, 즉 물의 축까지 단 차이는 근 30m. 물의 축이 시작되는 지점까지의 거리는 800m가 넘는다.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정원이지만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르노트르는 이 거대한 공간이 한눈에 잡히도록 소위 역 원근법이라는 것을 고안해 거리를 ‘시각적’으로 대폭 축소했다. 아래로 내려가 곧바른 길을 끝없이, 지루하게 걸어가다 보면 비로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작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무니 꽃이니 하는 개체의 자연성은 물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베르사유는 정원이라기보다는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권력을 과시하는 정치적 공간 프로그램이며 절대 왕권의 상징이었다. 그의 정원사 르노트르는 “세상에다시 없는 큰 정원을 만들라”라는 왕의 명령을 초과 달성했다.

03.창덕궁 관람정 ⓒ셔터스톡



인간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 그 간극을 생각하다

조선의 태종도 남 못지않은 강력한 왕이었지만 자연까지도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사고체계로는 불가한 일이다. 그의 건축가 박자청은 한술 더 떠서 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지형을 따라 진선문 앞마당을 사다리꼴로 만들었다. 왕의 명령보다 자연의 이치가 더 지엄했다.

베르사유 궁전이 들어선 땅은 원래 지형의 높낮이가 없는 평평한 습지였다. 굳이 습한 땅에 궁전과 정원을 짓겠다고 고집하는 왕의 뜻을 따르기 위해 르노트르는 대형 운하를 파서 그 안에 습지의 물을 모으고 거기서 퍼낸 흙으로 테라스를 쌓았다. 분수광이었던 루이 14세를 만족시키기 위해 멀리 센강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다. 르노트르는 주어진 자연조건하에 왕의 분부대로 정원을 만들기 위해 박자청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완전히 거슬렀다고 하기도어렵다. 그러나 만약 언덕이 있었다면 피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이치가 우선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20세기 중반, 서구에서는 인간이 만물 위에 군림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깨닫고 자연보호, 환경보호 운동을 시작했다. 한때 사라와지가 무엇인지 배우고자 했던 것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을 배우려 애쓰고 있다.

우리의 경우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산을 깎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왕권의 상징인 궁궐조차 자연에 순응하며 지었던 선조들이 과연 무어라 할까. 창덕궁과 그 후원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줄까? 글, 사진자료. 고정희(서드스페이스 베를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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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