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

2015년 영화 이 천만대 관객을 모으면서 사람들에게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시기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한 것은 뜻밖의 덤이라고 봐도 좋겠다.

한일합방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
단체로 도쿄 관광여행도 다녀왔다.


▲ 을사늑약(1905)의 전문.



일제는 이 강제 불법 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2015년 영화 <암살>이 천만대 관객을 모으면서 사람들에게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시기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한 것은 뜻밖의 덤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 잘 만들어진 한 편의 활극은 흥미진진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인과로서의 ‘지금, 여기’의 문제를 환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잊힌 이름인 약산 김원봉이나 친일파, 의열단, 반민특위와 같은 현대사의 몇몇 장면들과 함께,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혼곤한 자유의 근원을 잠깐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해방 70년을 맞지만 정말, 우린 온전히 해방되었는가, 여전히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8월은 해방(1945)을 맞이한 달이다. 그러나 이 달엔 일제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불법적으로 체결하여 공포한 경술국치일(1910. 8. 29.)도 있다. 35년의 시차를 두고 있긴 하지만 8월은 망국의 치욕과 해방의 기쁨이 공존하는 달인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 개항을 따낸 일본은 조선침략의 장기적 계획을 수립했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막 나라의 문을 연 조선은 급격한 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서서히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고종이 조인을 거부하자 이토는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을 회유하고 이들에게 조약체결의 찬반을 따져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등이 반대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들 다섯 역신(逆臣)이 '을사오적(五賊)'이다.

이토는 각료 8명 중 5명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그날 밤 황제의 재가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한 것이었다. 을사년(1905)의 이 불법 조약을 '을사늑약(勒約,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 을사오적. 이들은 모두 백작에서 자작까지 작위를 받았다.
출처서대문형무소 박물관 전시 사진



이태 후인 1907년, 일본은 강력한 침략 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법령권 제정·권리 임명권·행정구의 위임 및 일본인 관리의 채용 등에 간섭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7개 조목의 불평등조약을 강요한다. 이토는 이완용 매국 내각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통감의 사저에서 한국 측 전권대신인 이완용과 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정미7조약(신한일협약) 조인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 등 7명이 참여했다. 이들이 바로 ‘정미7적(賊)’이다.

1910년 일제는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이 조약에 찬성 협조한 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이었다. 이들을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 부른다.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경술국치는 대다수 백성들에겐 슬픔과 고통의 세월로 다가왔지만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고 동포를 등졌던 부일 반역자들에겐 부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망국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과는 달리 병합에 협력한 왕족들과 관료들에게는 일제로부터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賜金)이 주어졌다.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을 귀족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것은 더러운 매국(賣國)의 상급(賞給)이었다.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 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급(恩給)을 줌.
- ‘병합 조약’ 전문 중에서



이들 수작(受爵)자들은 대부분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위기에서 목숨을 던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적극 협력했다.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들은 왕족 출신 13명(후작 6, 백작 2, 자작 2, 남작 3명)과 합병에 공을 세운 대신(칙임 1등, 종1품)들 63명(백작 1, 자작 20, 남작 42명) 등이다. 망국의 책임을 지고 목숨을 내놓아도 시원찮을 자들이 오히려 매국으로 원수의 포상을 받은 것이다.



작위와 은사금 받은 68명의 조선귀족들
후작에 선임된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등은 모두 왕족 출신이다.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아비고, 윤덕영은 그의 형이다. 1884년 김옥균, 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 금릉위(錦陵尉)였다.

개화파의 풍운아로 매기는 관점도 있지만, 박영효는 1939년 일본의 대륙침략 낭인단체인 흑룡회(黑龍會)가 주최한 ‘일한합병 30주년 원훈(元勳) 추도식’에서 이용구·송병준·김옥균·이완용 등과 함께 원훈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그가 조선병합의 으뜸 공로자라는 얘기다.

왕족이 아닌 대신 출신으로는 백작 이완용, 자작 고영희·민병석·박제순·윤덕영·이병무·조중응 7명은 강제병합조약 당일 어전회의에 참석한 이른바 경술국적이다. 고영희·이병무·조중응은 정미조약, 박제순은 을사늑약 당시의 내각 대신으로 각각 을사5적, 정미7적으로도 불린다.

일제가 작위를 받아들인 자나 거부·거절한 자에게 적용한 기준은 ‘충(忠)’과 ‘공로(功勞)’였다. 즉 작위 수여를 받아들인 자는 충순(忠順)한 자 또는 공로자, 거부·거절한 자는 충순이 결여되어 있거나 스스로 공로자이기를 거부한 자로 판단했다는 것이다.[일제 강점기 ‘조선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이용창) 참조, 이하 같음]

‘조선귀족령’을 제정한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귀족집단을 만들어 낸 것은 개항 이래 침략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귀족에게서 식민통치를 앞장서 선전하고 정당화할 전위대이면서 ‘천황’('일왕'이 바른 표기나 문맥을 고려해 그대로 썼다. 아래 같음.)의 충량한 신민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했다.

그래서 조선 귀족이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조선귀족령’의 조항을 적용해 작위를 박탈하기도 했다. 명백한 위반자라 하더라도 식민통치의 이용가치가 있으면 작위의 유지와 정지를 반복하면서 귀족신분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귀족의 명예나 일본 정부 및 총독부의 권위·체면 등을 위해 사퇴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수작자들은 대부분 수작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이 도쿄 관광여행에서 찍은 기념사진.



76명의 수작자들은 대부분 흔쾌히 작위를 받아들였고 작위와 은사금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작 이해승은 작위 수여식 4일 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선조의 묘소에 가서 작위를 받았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서작(敍爵) 봉고식(奉告式)’을 거행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인 이해승이 일제의 식민지 병합 정책에 순응한 대가로 일제와 천황이 주는 작위를 받고 그에 감읍하여 조상의 묘를 찾아 제를 올린 것이다. 거기에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 따위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이었다.



8명의 수작 거부자
그러나 76명의 수작자 가운데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남작 김석진을 비롯한 8명의 거부자들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작위 수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천황이 주는 작위 사령서도 거절했으며, 강제 발부된 사령서도 반납함으로써 강제병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작위를 받은 일이 일제 측의 일방적인 강요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 8명의 수작자들이 즉시 작위를 거부·거절한 것은 그게 허튼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처음에 작위를 받아들였던 자작 김윤식·이용직, 남작 김가진·김사준 등 4명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작위를 박탈당했다.

김사준(남작, 2만5천 원)은 ‘조선보안법 위반사건’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1915년에, 자작 김윤식(5만 원)과 이용직(10만 원)은 1919년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1919년 각각 작위를 잃었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남작, 2만5천 원)은 작위를 박탈할 마땅한 조항이 없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귀족령’의 ‘6개월 이내 상속 신고’를 적용해 ‘습작신고 불이행에 따른 습작불능’을 적용함으로써 그의 작위를 박탈했다.

나머지 습작자 가운데는 형을 선고받거나 품위를 잃은 행위로 말미암아 일제로부터 작위를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백작 민영린은 아편흡입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실작했고 남작 조희연은 재산을 탕진하고 빚으로 쪼들리다 작위를 반납했다. 백작 이지용은 도박 때문에 예우 정지와 회복을 거듭해야 했다.

대한제국의 일부 황족과 국정을 책임졌던 관료들은 매국 행위의 대가로 조선 귀족에 선정되었다. 이들이 일제의 작위를 받아들인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는 게 마땅하다.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매국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수작은 명백한 '매국의 증거'
이들 수작자들이 받은 은사금과 토지 등을 포함하여 친일 부역자들이 증식해 온 재산은 <뉴스타파>에 따르면 여의도의 150배인 4억3천만㎡ 추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재산 가운데 국가가 친일재산으로 결정하여 국가로 귀속한 땅은 1,322만㎡, 0.3%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민족을 등지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려온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매국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증식하면서 대대손손 주류 기득권의 성채를 지켜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이 나라의 주류 사회의 일원들이다. ‘친일’의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는 일이 어렵고 더디기만 한 이유다.

해방 70년이 지났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는 동족 간 전쟁을 치렀고, 수십 년 동안의 군부 독재 시대를 견뎌내야 했다. 마침내 피땀 흘려 빼앗긴 민주주의도 되찾았고 이제 한국은 세계 십몇 위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해방 70년이라는 시간을 무화시키는 것은 청산되지 못한 역사다. 나라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비극적 현대사를 넘기 위한 제일의 전제는 그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 우리는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과연 지금, 우리는 온전히 해방되었는가.
우리는 지금 1945년 8월 15일에서 몇 발자국이나 왔던가.  출처/김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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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