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가득한 고대왕국 백제의 산성에 오르다

봄바람 가득한 고대왕국 백제의 산성에 오르다

 

봄바람 가득한 고대왕국 백제의 산성에 오르다.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특히 많다. 높고 낮은 산이 많은 까닭이다. 고대왕국 백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백제 후기 부흥과 패망의 역사가 교차하는 부여에는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유사시에는 적과 맞서는 방벽으로 사용하던 산성이 있다. 동성왕 때 쌓은 가림성과 무왕이 완성한 부소산성이 그것이다.  © 부여군

 

백제 부흥의 배경, 에두른 산성들

한반도 고대국가의 흥망성쇠는 한강 유역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가장 먼저 승기를 잡은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근초고왕(?~375년)은 마한 전 지역을 평정하고 고구려 평양성까지 공격하는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4세기 말 고구려 장수왕(394~491년)의 남진에 따라 한강 유역의 패권이 고구려에 넘어가 버렸다.

 

그 후 백제의 한성시대가 막을 내리고 웅진시대(475~538년)가 열렸다. 무령왕(462~523년)은 혼란에 빠진 나라를 안정시키고 중국과 활발한 외교를 펼쳐 고구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웅진은 군사적 이점은 있으나 팽창해 가던 백제에는 비좁은 땅이었다. 이에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554년)은 지금의 부여, 사비로 천도해 백제 부흥을 이끌었다.

 

부여에서 백제가 부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군사적 안정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중심에 사비성 외곽을 감싼 거점 산성인 석성산성, 중산성, 청마산성, 가림성이 있다. 그 가운데 가림성은 사비시대(538~660년) 도성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다. 원래 성흥산에 있는 성이라 해 ‘부여성흥산성’이라 불렀는데, 2011년 7월 축성 당시 지명을 따라 사적 제4호 부여 가림성(扶餘 加林城)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가림성은 백제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는 용도로 백제 동성왕 23년(514)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한다. 가림성은 부여읍에서 10km 남짓 떨어져 있지만, 부여읍과 가림성 사이에 금강이 가로놓여 있어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로서는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림성을 쌓은 백가는 자신을 가림성에 보낸 데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한 뒤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01. 가림성 초입에 ‘사랑나무’라 불리는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88호 임천 가림성 느티나무가 서 있다.

 

가림성의 어제와 오늘

성흥산은 높이가 해발 260m로 그리 높지 않다. 산성 턱밑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고, 주차장을 지나 성으로 오르는 길은 포장이 잘돼 있다. 외딴 산중에 자리한 1,500년도 더 된 산성에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이유는 이곳을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삼으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진 촬영 명소로 알려진 까닭이다. 산 중턱에 오르면 그 증거들을 마주한다. < 서동요 >, < 엽기적인 그녀 >, < 신의 >, < 대왕세종 >, < 육룡이 나르샤 > 등 가림성을 스쳐 간 수많은 작품의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몇 걸음 더 걸어가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5층 빌딩 규모의 큰 암벽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돌계단이 이어진다. 육중한 바위 주변에는 봄볕에 몸을 내맡긴 수목이 한껏 해를 바라고 있다. 그 가운데 유독 시선이 머무는 나무가 ‘사랑나무’로 불리는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88호 임천 가림성 느티나무다. 수령이 약 22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키가 약 22m라고 하는데, 성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보다 훨씬 커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가림성 정상이다. 뺨에 스치는 바람이 훈훈하고, 따뜻한 봄볕에 만물이 잠든 듯 평온하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풍경이 막힘없이 탁 트였다.

 

가림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빙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산성의 한 형태] 산성이다. 지금까지 성 안에서 확인된 것은 북쪽 성벽 안쪽,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수구(물을 흘려보내는 시설물)로 추정되는 석렬(石列)의 자취와 조선시대 집수지 등이다.

 

02. 성흥산 중턱에 자리한 대조사    03.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扶餘 大鳥寺 石造 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7호 ⓒ문화재청

 

가림성을 내려오면 산 중턱쯤 연등이 내걸린 대조사가 있다. 이 절은 백제 성왕 때 승려 겸익이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천년고찰이라 하지만 전각은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전부이고, 그 흔한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조차 없다. 그렇다고 챙겨 볼 문화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웅전 뒤 언덕엔 보물 제218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과 쌍벽을 이루는 보물 제217호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扶餘 大鳥寺 石造彌勒菩薩立像)이 있다. 이 입상은 커다란 천연 바위 하나에 머리와 몸체를 새겨 만들었다. 높이가 10m나 되기 때문에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느낌을 받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눈매가 양옆으로 길고 양쪽 귀는 위아래로 늘어진 데다 상대적으로 코와 입이 작아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몸체가 뭉툭하고 얼굴이 크고 넓적한 데다 신체 비례가 5등신에 가까워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옷자락 밖으로 나온 손 모양과 연꽃 가지를 든 모습은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재미난 것은 입상 앞에 있는 용화보전에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크게 유리창을 내 입상이 보이도록 했다. 용화보전 실내에서 보는 입상의 표정은 밖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자상하고 푸근하게 느껴진다.

 

04. 왕궁의 후원 기능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소산성에는 산책로가 많이 남아 있다.

05.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사자루

 

백제 패망의 마지막 무대, 부소산성

사적 제301호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는 사비도성 중앙에 있던 절터다.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현재 남은 것은 중문 앞 연못과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그리고 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이 전부여서 넓은 터가 황량해 보일 정도다.

 

그래서 더욱 석탑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나당 연합군과 치른 전쟁에서 패한 백제는 텅 빈 절터처럼 수수로웠을 것이다. 봄은 왔지만 아직 잎사귀를 피우지 못한 나무들이 패망한 왕국의 서글픈 모습을 웅변하는 것 같다. 먹먹한 마음을 뒤로하고 사적 제5호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부소(扶蘇)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을 뜻한다. 이름처럼 지금도 부소산에는 육중한 고목이 많다. 하지만 백제 때 것은 아니다.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한 뒤 부여는 이레 동안 화염에 휩싸였다고 한다. 부소산의 소나무도 그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토종 소나무와 리기다소나무를 심어 지금처럼 다시 울창해졌다. 현재는 리기다소나무를 토종 소나무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구한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부소산성에는 정자도 많고 여기저기 산책로도 많다. 부소산성이 단순히 방어 목적의 성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는 부여로 천도한 뒤 새 왕궁을 부소산 기슭에 건설했다. 그 터가 부소산 아래 관북리 유적지다. 그렇다면 부소산성은 왕궁의 후원 기능을 겸했을 것이다. 이것이 부소산성 숲길 이름 가운데 태자골 숲길이 있는 이유다.

이름처럼 평상시에는 왕자들이 산책을 즐기다가도 유사시에는 적을 막는 방어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부소산성에는 깊은 잠에 빠진 백제 역사를 일깨우는 문화재가 여럿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삼충사(三忠祠)도 그중 하나다. 삼충(三忠)이란 나라를 구하려다 죽은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일컫는 말이다.

 

06.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화정              07.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고란사

 

부소산성에는 패망한 왕국의 서글픈 흔적만 있는 게 아니다. 해맞이와 달맞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누각도 있다. 동쪽에는 해맞이를 할 수 있는 영일대(迎日臺)를, 반대편 서쪽에는 달맞이를 위한 송월대(送月臺)를 지었다. 아쉽게도 두 누각은 원래 건물이 아니다.

 

영일대는 조선 고종 8년(1871) 홍산 군수 정몽화가 지은 관아문을 영일대 자리에 옮겨 세운 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영일루(迎日樓)로 고쳐 부른 것이다. 송월대 역시 조선 순조 24년(1824)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임천의 관아 정문을 1919년 이곳으로 옮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사자루(泗樓)라 정했다. 아쉽게도 영일루에서는 잡목에 가려 해맞이를 할 수 없지만, 사자루 2층 누각에 오르면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군창지(軍倉址)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원래 곡식 창고였는데, 1915년 땅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적에게 군량을 빼앗기면 안 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곡식 창고에 불을 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큰 건물 터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표식이 남아 있고 소나무가 울창한 숲처럼 보이지만, 잠시 절체절명의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면 불을 지르는 다급한 병사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부소산은 해발 106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아니, 산이라 부르기에 민망하다. 야트막한 언덕 같아서다. 그런데도 부소산성 길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역동적이다. 이유는 산성 축성방식에 있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包谷式,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도록 성벽을 쌓은 산성의 한 형태)이 혼합된 복합식으로 축성했기 때문이다.

 

백제 패망의 그림자는 언제나 삼천궁녀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낙화암(落花岩), 그리고 방탕한 의자왕(?~660년)의 실정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모든 후궁이 이곳에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라고 『백제고기』를 인용해 전한다. 문제는 후세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또한 많다는 뜻의 삼천궁녀로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전설만 내려온 결과라 하겠다. 의자왕 역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 일컬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여실히 드러나 씁쓸할 뿐이다.

 

낙화암을 돌아 나와 강변으로 내려서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고란사(皐蘭寺)에 닿는다. 이 절은 불교 유적보다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로 더 유명하다. 약수를 한 번 마실 때마다 3년 젊어진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부소산 구문을 나서면 사비도성으로 알려진 사적 제428호 부여 관북리 유적(扶餘 官北里 遺蹟)에 이른다.  글, 사진. 문화재청 / 임운석(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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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