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산 상이암 ( 聖壽山 上耳庵)

성수산 상이암 ( 聖壽山 上耳庵)

 

성수산가는 길은 멀다. 서울서 오전7시30분 출발한지 거의가 5시간정도 걸린다. 성수산(聖壽山)은 해발 876M로 임실의 주산(主山)이다. 장수 팔공산 준령이 치달아와 힘찬 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호남의 미목(眉目)으로 여덟 명의 왕이 나올 길지(吉地)라 일컬어 온 명산이다.

 

 

 

 

 

 

 

 

상이암은 도선국사가 처음 창건하여 도선암이라고 불렀던 것을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기연을 얻은 후로 상이암이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병화를 입었던 것을 1909년 김대건 (金大建)이 중건하였고, 일본 강점기에는 의병장 이석용이 상이암을 근거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탔다. 1912년 대원(大圓) 스님이 재건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당시 소실되었다가 1958년 임실군수 양창현(梁昌鉉)이 중심이 된 상이암 재건위원들이 빈터에 법당과 요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과 요사채, 산신각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상이암부도 3기가 있고, 고려태조와 조선태조의 설화를 간직한 환희담비와 삼청동비가 있다. 무량수전의 맞은편으로 마치 바위 여러 개를 정형성 없이 쌓아놓은 듯한 향로봉(香爐峰)은 이 곳을 쫓아서 성수산에서 내려오는 9개 지맥이 마치 여의주를 향하고 있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無量壽)는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신 전당이다.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 무량수불이므로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봉안된다. 후불탱화로는 극락정토 사실적으로 묘사한 극락회상도를 주로 봉안하며, 그밖에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묘사한 극락구품탱화나 이미타 탱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에 있다하여 보통 무량수전의 전각은 문 방향을 남향으로 놓고 아미타불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게 놓는다. 이렇게 하여 참배자는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된다.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 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함께 한국의 사찰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으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전각이다. 87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을 하였고 1394년 각여 선사가 중수하여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왔다. 국난(國難)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수

하여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로 아미타불을 모신 전당이 되었다. 상이암, 향로봉 기도바위에서 무량수전을 향하면 정면으로 아미타불과 눈이 마주친다.

 

 

 

삼청동비(三淸洞碑)와 여의주

이성계는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치고 돌아가던 중 무학대사의 권유로 고려 태조 왕건이 가르침을 받은 이곳을 찾아 백일기도를 올렸다. 3일을 환희담에서 목욕재계하는 동안 동자승이

나타나 씻으면서 한담을 나누었는데, 그 동자승이 바로 부처

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석면에 세 글자를 새겼으니 이것이 삼청동이다. 그날 밤에 신광이 하늘을 꿰뚫고 서기가 공중에 서리면서 한 가닥 무지개가 하늘로 뻗히며 공중에서 소리가 세 번 들리기를 “이공은 성수만세를 누리라” 하였다. 이로써 하늘이 호응하고 땅이 조력하여 과연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하여 도선암을 상이암이라 고쳤으며, 훗날 태인현감 손병호가 어필각을 지어 삼청동비를 모셨다. 또한 비각 뒤의 바위를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향로봉은 아홉 마리 용이여의주를 향해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모여드는 형국으로 지금도 기(氣)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상이암 화백나무

무량수전 앞마당에 몸통은 하나요, 아홉 가지가 강하게 뻗어 올라가는 나무가 있다. 아홉 가지의 의미는 성수산 九爭龍珠形(아홉 마리 용이 기운을 발하여 모여드는 형국)의 기운과 무관하지 않다.

수령은 120년이다. 화백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있는 시간만큼 나무의 기를 충만할 수 있다. 요즘은 피톤치드를 내뿜는 화백나무가 삼림욕으로 인기가 높다. 평상에 앉아 스님과 다례(茶禮)를 나누는 시간은 극락세계가 따로 없다. 화백나무 그늘에서 설법을 하는 스님의 모습이 석가모니가 보리수 그늘에서 설법하는 이치와 다를 게 없다.

 

 

청실배나무

수령이 600년이 넘은 청실배나무는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드리며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돌배나무와 비슷한 종으로 집 근처나 산에서 자라는 나무다. 청실배나무는 사찰이나 서원에서 향사를 올릴때 쓰는 과일이며, 옛날에는 과일이 흔하지 않아 서원이나 사찰을 지을 때 배나무를 심어 과실이 익으면 불전이나 영전에 바쳤다.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내려 꾸준히 성장하여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봄이면 이화(梨花)가 만발하여 광명등처럼 암자를 환하게 밝혀준다

 

 

상이암부도(上耳庵浮屠) 문화재자료 제124호,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50호

 

고승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다. 상이암은 성수산(聖壽山)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

慧月堂(혜월당)', '杜谷堂(두곡당), 당호가 음각되어 있는탑신은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해월당 부도는 항아리 모양을 한 탑신과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다. 두곡당 부도는8각의 받침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얹은 구조로 탑신에는 위아래에 넝쿨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무명의 부도는 상륜부와 노반, 보주까지 환형으로 남아 있다. 상단에 거북이가 양각으로 조각되어있다. 조선시대 부도에는 주로 기단부 중대석에 동물조각이 있는데, 이처럼 상륜부에 있는 예는 드물다. 이 부도의 탑신에는 아무런 명문이 없어 부도의 주인공은 알 수 없다.

 

 

 

환희 담(歡喜潭)

왕건이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백일기도를 올리고 못에서 몸을 씻는데 이때 부처님의 영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바위에 환희담이라고 글자를 새겼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계곡을 정비하다가 큰바위에서 거의 마모가 되어버린 글씨가 발견되어 글씨 부분을 절개하여 현재 위치인 칠성각 앞에 모셔 놓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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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