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았던 아동문학가 방정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어린이 교육인, 어린이 인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았던 아동문학가 방정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어린이 교육인, 어린이 인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가 공휴일인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며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월간지 3호 개벽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 여기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도 하였을 정도로 사실상 한국 어린이 인권 개념 자체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한 번안 동화 단행본인 사랑의 선물과 추리 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이 있다. 아동문학지를 간행하여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소파(小波)라는 호가 잘 알려져 있다. 상당한 부잣집으로서 집은 큰 기와집 한 채로도 부족해서 두 집을 사서 이어 붙여 만들었을 정도로 엄청 으리으리했고, 또한 하인들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금수저로 태어난 방정환은 지역 유지이자 부잣집 아들로서 어릴 때는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들어가 엿, 과자,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간식을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기에 콩고물을 얻기 위한 동네 아이들은 항상 방정환을 따라다녔고, 그 덕에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이었다. 또한 그럴 때마다 가게 주인은 방정환의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가곤 했다.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안에 소파 방정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전학하여 1913년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14년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했다. 1917년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 천도교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1917년 류광열, 이중각, 이복원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1919)을 펴냈다. 1917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손병희를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이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부터 방정환은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1920년 개벽사 도쿄 특파원이자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를 공부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같은 해 7월, 안데르센과 그림의 동화와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번역해 사랑의 선물을 엮어서 다음 해 출판했다.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해 제1회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1923년 3월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같은달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졌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1923년 5월 1일



                                        방정환 재단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 등의 전단 12만 장이 배포됐다. 1925년 토요일마다 천도교기념관에서 방정환의 동화회가 열렸는데 1000장의 입장권이 항상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같은 해 서울의 40여 소년단체를 통합해 ‘소년운동연합회’를 조직했다. 1927년 어린이 1월호부터 1930년 12월호까지 어린이 독본을 총 20회 연재했는데 당시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했다. 1927년 4월 개벽사 필화사건으로 차상찬과 함께 구속됐다가 석방됐다. 이후 방정환은 사상의 대립으로 소년운동단체가 분열하자 소년운동단체 일선에서 물러났다. 1930년 어린이 발행 부수가 삼만 부를 상회했다. 1931년 7월 23일 과로와 스트레스 등으로 쓰러졌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독립운동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는 방운용(方云容, 1918 ~ 2002) 전 색동회 부회장, 방하용(方夏容)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의 망우역사문화공원[37]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봉분 대신에 자연석들을 두르고 그 위에 묘지석을 얹어 놓은 형태의 돌무덤이다. 그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글씨가 크게 써있고 밑에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쓰여 있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독립된 존재이자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어린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말을 알리고, 강연회와 강습회, 동화구연대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 번역‧번안 동화, 수필과 평론을 발표했고, 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저서로는 사랑의 선물이 있다. 사후에 소파전집 소파동화독본(1947), 방정환아동문학독본(1962), 칠칠단의 비밀(1962), 동생을 찾으러(1962), 소파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발간되었다.

소년운동은 1937년 이후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가 광복 이후 재개되었다. 1957년 어린이날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 선포되었고 같은 해 방정환의 기일에는 ‘소파상’이 제정됐다. 1971년 40주기를 맞아 방정환의 동상이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졌다가 1987년 5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됐다. 1983년 5월 5일 망우리 묘소에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세워졌다. 1987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됐다. 1996년 소파 방정환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1998년 한국방정환재단으로 개칭되었다.      자료참조 서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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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