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22

한양에서 의주를 거쳐 중국 북경으로 이어지는 벽제관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22

한양에서 의주를 거쳐 중국 북경으로 이어지는 벽제관길

경기도 고양시는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평양을 거쳐 압록강 변의 의주로 이어지는 제1로인 의주 대로가 통과하던 곳이다. 의주길은 한양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대중국 교통로였다. 관서대로, 경의대로, 연행로, 서북로라고도 불렀다. 신경준 선생의 도로고에는 경성서북저의주로제일(京城西北低義州路第一)이라고 적혀있다. 즉 의주길을 제1로로 적은 것인데 그만큼 조선 정부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는 뜻으로 알 수 있다. 한양 숭례문에서부터 홍제원,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가는 길이었다.

의주길은 연행로 즉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는 연행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17세기 이후에 유입되는 지동설이나 천주교와 같은 서양의 과학과 사상, 전 세계의 문물이 중국으로 오가는 연행을 통해서 도입되었고,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견문록 열하일기를 쓰고, 이승훈과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를 배우러 중국으로 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었다.

의주대로의 시작점에 있는 벽제관은 고양리에 인접한 혜음령(164m) 바로 아래 벽제리에 있던 곳이었다. 고양리는 지금의 고양시 고양동이고, 혜음령은 고양시 벽제동에 있다. 벽제관은 1476년 성종 시기에 건립되었으며, 한양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대로변에 있던 역관 가운데 하나이다. 벽제관은 조선 시대 교통기관이었던 벽제역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교통과 통신의 이용이 매우 편리했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오기 전 하룻밤 쉬던 곳이었다.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묵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역참이었는데, 특히 벽제관은 조선으로 들어오는 중국 사신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에 체제를 재정비하는 곳이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단을 한양 이전에 환영하고 맞이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임금이 제릉(濟陵)으로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숙소로 머물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제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묘소다. 신의왕후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사망했다. 후대의 임금들은 제릉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친제(親祭)를 하기 위해 의주길을 통해 제릉으로 행차했었다. 이때 벽제관에서 숙박하였다. 제릉은 북한의 개성시에 있다. 벽제관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부가 헐렸지만, 그런되로 모습을 유지하던 벽제관은 한국 전쟁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남아있던 삼문까지 1960년대 허물어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사적 제14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어, 의주길이 중요한 연행로였음을 알려준다.

그 밖에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관이었던 김지남 묘와 율곡 이이 선생이 즐겨 찾아 풍류를 즐겼던 화석정이 의주길에 있다. 역관 김지남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약한 인물로 만 18세인 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한 후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의 여러 업적 중 하나는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것이다.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이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당시, 아들 김경문과 함께 참석했다. 또한 1714년 역관으로 활동한 경험을 참고해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통문관지라는 책을 아들과 함께 저술 했었다. 이는 당시 외교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필수서가 되었고 일본과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무덤은 사신단이 지나던 길목에 있다. 김지남은 유언으로 자신의 묘를 사신과 역관들이 왕래하는 길에서 잘 보이게 써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사신단의 주요 경로인 의주길 옆에 묻혔다. 김지남 묘는 현재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에 위치해 있으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의주로변에 있던 고양리는 조선 시대 고양군의 치소였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지만, 근대에 건설된 신작로인 고양리를 비껴가는 국도 제1호선과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크게 발전하지 못하여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또한 의주길은 국제 무역의 장터였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을 사이에 두고 중계무역을 했었다. 조선은 일본에 인삼을 팔고 은을 받았는데, 이 은을 다시 중국과의 교역에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무역의 주 수송로가 바로 이 길인  의주길이었다.

경기도에서 경기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한 벽제관길은, 한양과 중국을 드나들던 사신이 이동했던 의주대로의 첫 구간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 밖에 있던 지금의 독립문에서 무악재를 넘어 연신내와 구파발을 포함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에 포함되는 길만으로 한정 언급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삼송역의 출구에서 시작한다. 삼송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있으며, 역의 동쪽으로는 국도 제1호선이 통과한다. 삼송역 일대의 골목길에는 집의 벽마다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진 벽화 골목이 있다.

삼송역에서 벽제교까지의 구간은 국도 제1호선의 동쪽에 있는 길을 따라간다. 벽제교에서부터 국도 제1호선과 국도 제39호선이 만나는 대자삼거리까지는 국도 제1호선의 경로를 따라간다. 대자삼거리를 지나 벽제천을 건너자마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벽제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복교, 빈정교, 빈정1교 등을 지나 고양1교에 도착한다. 고양1교에서 혜음로를 따라가면 벽제관터에 도착한다.

경기도에서는 삼송역에 의주대로의 첫 지점인 벽제관길이라는 표지판을 세워 두었다. 삼송역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면 숫돌고개에 도달한다. 숫돌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찾아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1593년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의 기습으로 전투에서 패한 후 바위에 칼을 꽂았다는 고개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여송은 왜군을 따라 남하하다가 숫돌고개 근처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받고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겨우 탈출에 성공했기에 숫돌고개 근처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공릉천 근처에서 방향을 틀어 혜음령 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숫돌고개를 지나면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명확하게 기록해 놓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 문제를 해결한 역관 김지남의 묘를 통과한다. 김지남 묘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덕명교비를 만난다. 덕명교비는 의주대로 구간 가운데 공릉천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면서 자세한 사항을 기록해 놓은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수십 명의 이름이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벽제천을 건너는 벽제교를 통과한다.


                             경기고양 벽제관(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삼송역앞의 벽화골목


                                  덕명교비

                              역관 김지남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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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