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건물, 경복궁 자경전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여성이 주인공인 흔치 않은 건물 보물, 경복궁 자경전
경복궁 자경전의 아름다운 꽃담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경복궁 자경전은 꽃담과 십장생 무늬를 새긴 굴뚝으로 유명하다. 꽃담은 붉은 벽돌로 꽃문양을 만들어 네모난 틀 안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고, 굴뚝 벽에는 해와 달, 소나무와 불로초, 거북과 학 등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교태전 후원에도 벽돌 무늬로 치장한 굴뚝이 있지만, 자경전에는 못 미친다. 자경전은 흔치 않은 왕실 최고 여성이 주인공인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어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중앙의 자경전은 대비가 낮에 거처하는 공간이다


서북쪽에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동남쪽에는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다락집 청연루가 있으며 이어 오른쪽으로 열두간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다.    (이미지 네이버캡쳐)


보물 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무늬와 당초문, 박쥐문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문화재청

자경전은 왕실 최고의 여자 어른인 대비의 침전이므로 많은 온돌방이 마련되었고 그 방들에서 나온 여러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이 굴뚝은 나이 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 폭의 정교한 벽화라고 할 수 있다. 전 벽돌 담장의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생긴 벽 사이의 공간은 연기의 길이 된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큰 화면을 만들어 여러 모습들을 조형적으로 조각했다. 안주인의 무병장수를 주제로 삼아 소나무, 거북, 사슴, 불로초 등 오래 사는 십장생들을 묘사했다. 아래위로 작은 공간들을 만들어 여러 동물을 배열했는데 학은 장수를, 박쥐는 부귀를, 나티(짐승 모습의 귀신)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의미이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의 서쪽 담장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벽돌로 장식해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미지 네이버캡쳐)

자경전은 고종 5년(1868)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었다. 나이 열두 살에 고종이 즉위하자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국정을 맡았으며, 경복궁 중건은 왕후의 명으로 이루어졌다. 자경전은 바로 신정왕후의 거처로 지은 집이다. 자경전은 6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다. 동편에는 청연루라는 우뚝한 누각을 달아내고, 사방을 에워싸는 행랑에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는 방과 창고가 즐비했다. 대비 한사람을 위한 전각치고는 참으로 크고 우뚝하며 아름다운 치장으로 가득하다.


조선 전기 경복궁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 이름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왕이 승하하고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 선왕의 왕비는 대비가 되어 뒤로 물러나고 새왕과 왕비가 궁궐의 주인이 된다. 대비는 내전의 후미진 건물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세월을 선왕을 추모하며 지냈다. 성종 때는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대비에 준하는 할머니가 여럿 되자 별궁으로 창경궁을 지어 대비들을 모셨다. 이런 관행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17세기 효종이 즉위하면서이다.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는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도움이 컸다. 효종은 재위 중에 대비를 극진히 모셨다. 효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대비를 위한 수정당이 있었는데 집이 작고 초라했다. 효종은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터에 만수전이라는 큰 규모에 치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못을 갖춘 전각을 지었다. 대비 처소는 정전의 동편에 두는 것이 법도라는 신하들의 꽤 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지은 집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왕실에는 공교롭게 대비가 정권을 쥐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조 승하 후 영조 계비 정순왕후, 순조 승하 후에는 순원왕후가 어려서 즉위한 순조와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대비들은 만수전 터에 다시 지은 경복전을 거처로 삼았다. 나이 어린 왕들은 경복전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문안을 올리곤 했다.

궁궐의 전각은 늘 최첨단 건축기술을 동원해 집을 지어 왔다. 벽돌이 궁궐에 적극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헌종 때였다. 낙선재는 헌종이 서재로 삼은 별당인데, 이 건물 곳곳 에 이전에 볼 수 없던 벽돌 장식이 등장해서 궁궐 건축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낙선재 지붕 박공은 벽돌로 치장하고 후원 담장에는 벽돌로 길상문양을 장식했다.

경복궁 중건공사는 궁궐 건축의 새로운 실험장이었다. 무려 7,000칸에 달하는 많은 건물을 40개월 안에 끝내는 강행군이었다. 이 공사에는 단기간에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다양한 기술 고안이 시도되는 동시에 새로운 재료의 도입도 따랐다. 벽돌의 적극적인 활용도 그중 하나였다. 중건 경복궁에서 벽돌 활용이 가장 돋보이는 전각이 자경전인데, 왕실 최고 어른을 위한 건물이라는 점이 작용 했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비를 위해서는 교태전을 세우고, 고종의 할머니뻘 되는 분들을 위해서도 전각을 따로 지어 드렸다. 자경전을 비롯해 헌종비 효정왕후를 위해 만경전, 철종비 철인왕후를 위해 흥복전, 헌종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만화당을 지었다.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 전각이었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 자경전이다. 자경전은 중건 이후 한두 번 화재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본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최근 교태전이 복원되고 2020년에는 흥복전도 되살렸지만, 자경전의 격식에 비기지 못한다. 자경전은 집의 규모도 클 뿐 아니라 높고 시원한 누각을 곁들이고 곁에다 별당까지 둔 점이 각별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치장은 십장생으로 꾸민 굴뚝과 아름다운 꽃담이다. ‘어머니께서 복을 누린다’는 자경전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며 굴뚝과 꽃담을 다시 바라보면 새삼 이 집이 지닌 가치가 크게 다가온다.  참고자료 김동욱(경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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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