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사찰, 원원사 遠願寺

탑의 원래 목적은 점점 쇠퇴해지고 말세적으로 인하여 화려한 사치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신라는 저물어 갔던 것이다.

경주 원원사 遠願寺

서라벌에서 동남쪽 20여리 거리에 관문산성으로 가는 길에 봉서산이 있고 그 산기슭에 원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해로 상륙한 적들의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때는 불국사와 원원사 사이에 사찰이 78개나 있어서 마치 통로를 이루는 회랑과도 같았다고 한다. 불국사로 들어가기 위해 삭발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곳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모벌군성 성문에 이르러 삭발(毛伐)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로 들어갔다 해서 마을 이름을 모화라고 한다.



명랑법사의 후계자들과 김유신 장군, 술종 등의 신라 대신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외동에 건설한 호국사찰 원원사지에 남은 동서 삼층석탑 중의 서탑. 보물 제1429호로 지정돼 있다.


호국사찰 원원사지에 남아있는 동서 삼층석탑 사이에 석등이 우뚝 서있다.


삼층석탑의 기단석에는 12지신상이 돌아가면서 두텁게 조각되어 있고, 위층의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동서남북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수려해 예술성이 뛰어나다.


원원사(遠原寺)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은 김의원, 김술종과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는데 이미 불력을 과시한 바 있는 신인종(밀교계통의 종파: 명랑 법사가 종조이다)의 고승 안혜, 낭융 등이 세운 사찰로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래서 호국적 성격을 띤 사찰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찰은 폐사됐고 석탑도 무너졌다. 이 절터가 1930년대에 일본 교토대 고고학 교실 조수로 있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ㆍ1889~1954)에 의해 발굴되고 쌍탑인 삼층석탑(보물 1429호)이 복원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희귀 사진과 도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지금은 쌍탑과 석등만 송림 속에 묻혀있고 거리가 멀어서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원원사는 통일된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遠願寺로 쓰지만 삼국유사에는 遠源寺로 기록이 되어 있다.

절터의 양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동부도와 서부도가 남아있다. 또 동쪽 봉우리에는 안혜, 낭융, 광덕, 대연 4대덕의 유골이 묻혀있어서 사령산 祖師岩(조사암)이라고 한다. 절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근래에 아랫쪽에 천태종에서 새로 지은 원원사가 있다.

그 절 뒤로 오래된 돌계단을 올라가면 옛 절터가 나온다. 두 기의 삼층석탑이 나란히 반기고 있지만, 석탑은 온통 상처를 입어 무수한 고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탑 사이에 서 있는 석등은 화사석이 없는 형태로 남아있다. 또 금당터 옆으로는 용당이 있는데 수로를 돌로 잘 다듬어 놓았는데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가 없어서 더욱 처량하게 보인다.

삼층석탑은 무너져 붕괴 되었던 것을 1933년에 복원을 하였다. 이 탑의 특색으로는 2층 기단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고 1층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뚜렷하게 새겼다. 수미산의 표현을 잘 나타내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십이지는 주로 오른쪽을 바라보는 얼굴로 가지런한 연꽃 위에 앉아있다. 천의를 휘날리며 합장을 하였는데 안타깝게 파손이 심하다. 사천왕상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잘 다듬었는데 더욱 손상을 많이 입었다. 문비 속에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이것이 8세기 중엽의 양식으로 본다면 그 이후 9세기부터는 석탑을 만들 때 여러 가지 상을 조각하여 장식을 가미하게 된다. 탑의 원래 목적은 점점 쇠퇴해지고 말세적으로 인하여 화려한 사치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신라는 저물어 갔던 것이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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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