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 황복사

황복사는 지금 삼층석탑(국보)만 남아있고 절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터는 넓어서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 간다.

경주 황복사

낭산 동쪽에는 傳(전) 皇福寺(황복사)가 있다.

낭산을 뒤로 기대고 앞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멀리 진평왕릉이 보이고 감포로 넘어가는 숲 머리와 보문사지도 보인다.

황복사는 지금 삼층석탑(국보)만 남아있고 절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터는 넓어서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 간다. 또 특이한 것은 절터 내에 만들다 그만둔 왕릉이 남아있다.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형식인데 이것을 보고 왕릉의 호석 구조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어쩌다 버려진 왕릉인지 궁금하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다.


국보 황복사지 3층 석탑과 전경


황복사 목이 달아난 귀부


황복사 미완성 왕릉의 석조물


주변에는 목이 달아난 귀부와 건물의 초석들만 나딩굴고 있다. 황복사라는 이름은 부산에 살던 일본사람이 낭산 동쪽 기슭에서 '황복사'라는 기와 조각을 찾은 후부터였다. 그래서 전 황복사지라고 부른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진덕여왕 8년) 신라의 고승이며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 들과 탑돌이를 하면서 계단이 아닌 허공을 밟고 올랐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1942년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옥개석에서 사리함이 나왔다. 그 안에는 금제여래좌상과 입상, 유리구슬, 팔찌, 금실 등이 있었다. 금제여래좌상은 12.1cm로 국보로 지정되었고, 금제여래입상은 13.7cm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여래좌상은 불신과 좌대가 분리되는 특징이 있다. 소품이지만 그만큼 세밀하게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도 역시 삼국시대 불상 양식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  황복사 금제여래좌상

국보 황복사 금제여래입상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승하한 신문왕을 위해 왕비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에 탑을 세웠고 이후 700년에 신목태후가 돌아가시고 702년에는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이 706년 사리갖춤을 탑 안에 넣고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이다.

또 ‘돌아가신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이라는 뜻의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글자가 나와 왕실과 종묘에 대한 명복적 기능과 왕실 사찰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5차에 걸쳐 정밀 발굴 조사를 하였다. 금동 불상 7구와 명문자료, 공예품 등 27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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