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망덕사

부처를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말고 지혜의 눈을 먼저 뜰 수는 없는 것인가.

경주 망덕사지 (사적 제7호)


狼山낭산 앞에 너른 들판 가운데 오늘도 汶川문천이 금빛 모래를 적시며 조용히 흐르고 있다.


거기에 나즈막한 언덕이 있어 望德寺망덕사를 세웠다. 뒤로는 사천왕사에서 대중 공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릴 듯 가까운 곳이고, 앞쪽으로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는 남산의 마애불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곳이다.


신문왕릉도 있고 문천의 모래는 아직도 반짝거리는 유순한 들판이다. 어찌하여 예견이라도 한 듯 효소왕릉도 옆에 두고 있다. 692년 효소왕이 즉위하여 당나라 황실의 만복을 위하여 망덕사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경덕왕 14년(755)에 망덕사의 탑이 갑자기 흔들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때 마침 당 현종의 양귀비가 죽은 안사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 사람들은 역시 망덕사가 영검이 있는 것으로 더욱 믿게 되었다. 효소왕 8년에 망덕사에서는 낙성회를 크게 열었다. 그래서 효소왕이 친히 망덕사에서 공양을 하게 되었다.


마침 뜰앞에 허름한 행색을 한 비구가 서서 貧道(빈도)도 제발 이 齋재에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간청하였다. 그 비구는 남산 琵琶岩비파암에서 왔다고 했다. 효소왕은 이를 허락하여 저 끝에 있는 말석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는 이제 어디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을 드리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자 그 비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대궐로 돌아가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와 같이 공양을 함께 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는 몸을 솟구쳐 허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효소왕은 그제서야 놀랍고 부끄러워서 언덕에 올라 그 비구가 간 곳을 향해 큰 절을 하였다.


신하를 시켜 찾아보니 남산 參星谷삼성곡이라고 하는 비파암 위에 그의 지팡이와 바리때를 가지런히 놓고는 사라지고 없었다. 효소왕은 당장 비파암 밑에 석가사를 세우도록 하고 또 비구가 사라진 곳에는 佛無寺불무사를 세워 그 지팡아와 바리때를 모셔 두게 하였다.


용수보살이 지은 대지도론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옛날 인도 계빈국에 삼장법사가 아란야법을 행하여 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 큰 재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문득 방편을 써서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다시 가니 두 말 없이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한자리를 차지하고는 잘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옷 위로 부으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여러번 왔지만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마침 이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하였으니 마땅히 이 옷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고 했다. 이렇게 쉬운 비유를 들어가며 설법을 하건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직도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다.


부처를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말고 지혜의 눈을 먼저 뜰 수는 없는 것인가.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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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69호

(구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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