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탑에 대하여

탑, 그 뜻은 토석을 쌓아 올려 불신골(佛身骨) 즉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이다.

탑에 대하여

불교문화 중에서 불상과 더불어 탑은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탑의 역사 또한 불교의 성쇠에 따라 맞물려 왔다.

탑의 어원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파(Stupa)와 빨리어(巴梨語 Pali)의 탑(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 뜻은 토석을 쌓아 올려 불신골(佛身骨) 즉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구조물인 것이다. 2500년 전 처음에는 사리를 팔 등분 하여 여덟 곳에 탑을 세웠다. 그 후 2세기 중엽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팔대탑을 나누어서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탑을 세우고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그 모양은 반구형의 분묘와 같고 그 위에 사리를 안치하고 상륜을 장식하였다. 차츰 변하여 하부에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를 올리고 상륜을 여러 개로 치장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들어왔지만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다. 탑은 그 재료에 따라서 목탑, 전탑, 모전석탑, 석탑, 청동탑, 금동탑 등이 있다.

목탑은 화재에 취약하기도 하지만 많은 兵火로 고대 목탑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터만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 사천왕사 목탑지, 백제의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지, 금강사 목탑지, 평양 청암리 목탑지, 대동군 상오리사지 목탑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탑은 벽돌을 생산하는데 노동력이 많이 들고 작업 과정이 어려워 일부에만 다소 건립이 되었다.

모전석탑 역시 재료 확보와 돌을 가공하는데 여러 가지 조건이 까다로워 유행할만한 형식이 못되고 말았다.

그 외 청동탑과 금동탑은 주로 실내에 두는 소품으로 공예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석탑은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에 딱 맞아떨어진다. 질 좋은 화강암이 전국에서 채취되어 다양한 수법의 석탑이 천 여기 넘게 세워졌다. 그래서 탑을 보면 불교를 알고 지나간 역사를 읽을 수가 있다.

중국은 일찍부터 거대한 강 주변으로 진흙과 노동력이 풍부하여 벽돌탑을 세워 올렸다. 그래서 중국은 전탑의 나라이다.

반면에 일본에는 목재가 넉넉하고 지진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목탑이 주를 이룬다. 지금도 일본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호류지(法隆寺)5층 목탑 등은 그때를 말해준다. 그래서 일본은 목탑의 나라라고 한다. 불교를 받아들인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 후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에 석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삼국 말기에 목탑을 본뜬 탑이 백제에서 건립되었다. 백제는 그 당시 삼국 중에서도 건축술이 뛰어나 이웃 나라로 기술자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한 건축 기술에 돌을 접목하여 7세기 후반에 석탑을 시도한 것이다.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국보 제9호로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그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의 가구 양식으로 화강암이라는 파격적인 재료를 선택했다. 부재 하나하나를 나무에서 돌로 깎아 만들어 세웠다. 기단부의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여느 법당과 같은 수법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11호


부여 정림사지 석탑 국보 9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30호


의성 탑리 5층석탑 국보77호


한편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은 백제와는 다르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탑(塼塔)의 모방에서 출발한다. 그 유구로는 국보 제 30호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탑의 재료는 구운 벽돌이 아니고 흑갈색 안산암의 석재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원형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이 탑은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낙성이 되었다.

또 국보 77호인 의성탑리 5층 석탑도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 노반까지 남아 있는 높이가 9.6m인데 높이 단을 마련하고 자리를 잡았다.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삼국은 통일되었고 석탑은 새로운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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