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금동대향로의 정상에 위치한 새는 과연 봉황일까?

봉황(鳳凰)은 우리에게 친숙한 상상 속의 새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백제 금동대향로와 같은 공예품, 사찰의 부재, 그리고 왕비의 복식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봉황이라고 알고 있는 이 새가 과연 삼국시대에도 봉황으로 인식되었는지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정상에 위치한 새는 과연 봉황일까?

봉황(鳳凰)은 우리에게 친숙한 상상 속의 새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백제 금동대향로와 같은 공예품, 사찰의 부재, 그리고 왕비의 복식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봉황이라고 알고 있는 이 새가 과연 삼국시대에도 봉황으로 인식되었는지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시대에 따른 관점의 변화

우리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어떠한 사물에 대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의 사람들도 과연 똑같이 받아들였을까? 불상을 예로 다음의 두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백제 승려인 혜균(慧均, 생몰년 미상)의 저서로 알려진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에는 “같은 불상을 어떤이는 석가(釋迦)로 보고, 또 다른 사람은 미륵(彌勒)으로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으로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관촉사(灌燭寺)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미륵’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선 17세기 후반에는 사람들이 ‘관음(觀音)’으로 생각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사람마다 혹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봉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새를 과거 사람들도 동일하게 보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봉황과 금시조

봉황이 있는 여러 유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일것이다. 이 유물은 1993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여러 인물과 신기한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출토 당시부터 큰 이목을 끌었다. 이 향로 정상부에 위치한 새를 봉황으로 본다. 봉황은 『논형(論衡)』이나 『산해경(山海經)』 등 여러 문헌을 통해서 ‘태평성대(太平聖代)’ 혹은 ‘안녕(安寧)’을 뜻하고, 그 생김새가 닭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봉황과 비슷한 새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금시조(金翅鳥)로 일부 문헌에서는 봉황으로도 번역되었다는 점을 통해 두 새가 혼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두 새는 점차 구분되었지만 어떠한 연유인지 금시조라는 새는 우리의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져갔고 봉황만이 남겨졌다.

02.봉황머리모양 장엄구 ⓒ문화재청· (재)대한불교조계종 유지재단 문화유산발굴조사단

03.영친왕비 별문숙고사 부금 자적대란치마 ⓒ국립고궁박물관

04.영친왕비 도금봉황꽂이 ⓒ국립고궁박물관



여의주를 품은 새, 금시조

금시조는 봉황과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년)의 강설집인 『법화문구(法華文句)』에는 “나(지의)는 봉황이 생초(生草)를 밟지 않고 죽실(竹實)을 먹으며 유동(乳桐)에 살지만, 금시조는 용을 잡아먹으니 어찌 같은 류인가?”라는 기록이 있다. 지의는 이 두 새가 비슷해서 사람들이 혼동했기 때문에 이 두 새의 먹이, 사는 곳 등의 차이점을 언급해 봉황과 금시조를 명확하게 구별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덧붙여 그는 “금시조의 목에는 여의(如意)라는 구슬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봉황과 금시조는 비슷했지만 먹는 것, 거주하는 공간, 목의 구슬 유무로 구분했던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가장 위에 존재하는 새를 다시 주목해보자. 새의 목에는 구슬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봉황보다는 금시조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죽음 그리고 금시조

백제 금동대향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찰터에서 발견되었다. 능산리사지 주변에 고분군도 있어 향로가 출토된 사찰은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태평성대’나 국가의 ‘안녕’과 같은 상징을 갖는 봉황이 향로에 조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향로를 조각했던 백제 사람들은 죽음에 무게를 두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러 불교 문헌에 금시조는 죽은 자들을 열반안(涅槃岸)에 데리고 가는 새로 기록하고 있다.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에서 금시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백제 불교계에서 이러한 개념을 수용하여 향로 제작 시 반영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정상부의 새는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봉황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새가 어떤 새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시 백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인천공항 2터미널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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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