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규모와 형식을 겸비한 조선왕실 문서「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국보 지정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었으며,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춘 것은 물론 왕실 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24m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로 손꼽힌다.

압도적인 규모와 형식을 겸비한 조선왕실 문서「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국보 지정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국보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었으며,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춘 것은 물론 왕실 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24m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로 손꼽힌다.


01.국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앞부분) ⓒ문화재청 /  02.녹훈도감 선사어선연회도 ⓒ문화재청



회맹제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왕실 문서

실물과 관련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 있고 24m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갖춘 조선왕실의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국보로 지정되었다.「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1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2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가 1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숙종 재위(1674∼1720년) 중 일어난 여러 정치적 변동 때문이었다. 당시 남인(南人)과 더불어 정치 중심세력 중 하나였던 서인(西人)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집권해 공신이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신으로서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서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지위를 회복하였고 이때 1등~3등까지 총 6명(김만기·김석주·이입신·남두북·정원로·박빈)에게 ‘보사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회맹축은 숙종 연간 보사공신이 있기까지 공신으로 지위 부여(녹훈, 錄勳)와 박탈(삭훈, 削勳), 회복(복훈, 復勳)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자료이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회맹제3 거행 당시의 회맹문(會盟文,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 제사 때 신에게 축원하는 글)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었으며,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었다.


03.왕실 유물 중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문화재청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유일한 회맹축

조선시대에는 공신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10년까지 문헌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년(인조 24)과 1694년(숙종 20) 제작된 회맹축, 1728년(영조 4) 분무공신(奮武功臣) 녹훈 때의 회맹축이 그것이다.



이 중 영조 때 만들어진 이십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1646년에 제작된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寧國功臣錄勳後)」는 국새가 날인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어람용이자 형식상·내용상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


이 회맹축은 17세기 후반 숙종 대 경신환국4, 기사환국5, 갑술환국6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역사·학술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왕실 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한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이자 예술성 또한 우수해 국보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1. 녹훈도감: 나라에 공적을 세운 인물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관련 문서 등을 내리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2. 보사공신: 1680년 4월 서인이 다시 집권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였으나, 1689년에 지위가 박탈되었고 이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삭훈(削勳)된 공신들을 복훈(復勳)한 공신들
3. 1680년 회맹연에는 참석대상 총 489명 중 412명이 참석했으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로하거나 상(喪)을 당한 사람, 귀향 등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음
4. 경신환국: 1680년 남인이 서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실각해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
5. 기사환국: 1689년 숙종의 계비였던 희빈 장씨의 원자(元子) 책봉 문제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사건
6. 갑술환국: 1694년 서인들이 전개한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한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재집권한 사건  출처/ 편집부 자료.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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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