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 학문의 길로 나아가다

세자에 책봉되면 8~14세에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공자를 모신 성균관(成均館)의 대성전(大成殿)에 참배하고 스승을 맞이하는 예식을 치렀다. 이는 장차 임금 자리에 오를 세자가 유교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다짐의 상징적 예절이기도 하였다.

왕세자, 학문의 길로 나아가다



‘군사(君師)’는 고대 유교 국가에서 임금을 부르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임금은 정치 지도자인 동시에 사상과 학문의 지도자여야 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 군사였다. 이후 유교가 더욱 체계화되어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자 임금은 사상·학문의 지도자보다는 유교의 보호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유교의 보호자로서 임금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어야만 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왕조의 왕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세자에 책봉되면 8~14세에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공자를 모신 성균관(成均館)의 대성전(大成殿)에 참배하고 스승을 맞이하는 예식을 치렀다. 이는 장차 임금 자리에 오를 세자가 유교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다짐의 상징적 예절이기도 하였다.



세자의 스승과 공부의 벗

조선 왕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세자 자리를 거치지 않은 임금은 태조,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인조, 헌종, 철종, 고종 등 10명이었다. 나머지 17명은 세자 시절을 거쳤다. 이 가운데 성인이 된 후 세자가 된 정종, 태종, 세종, 효종, 영조 등 5명을 제외한 12명(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 광해군, 현종, 숙종, 경종, 정조, 순조, 순종)은 세자로서 교육을 받았다. 세자에 대한 실제 교육은 입학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임금의 큰아들이 태어나 ‘원자(元子)’라는 칭호를 받게 되면 보양청(輔養廳)이 설치되었다. 이후 원자의 나이가 3~4세가 되어 글을 배울 수 있게 되면, 보양청을 강학청(講學廳)으로 바꾸고 글을 가르쳤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 비로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별칭: 춘방(春坊))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별칭: 계방(桂坊))가 설치되었다. 춘방은 세자의 강학, 즉 교육을 담당하고 계방은 그 호위를 맡았다.

춘방과 계방의 관료 구성은 〈표 1〉에서 보듯 형식과 내용 면에서 많은 점이 고려된 것이었다. 첫째, 최고위 관직자인 영의정이 세자의 사(師), 좌의정이나 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이 세자의 부(傅)가 됨으로써 세자 교육의 정치적·형식적 위상을 높였다. 둘째, 왕실이나 관료 집단에 대해 사림(士林)의 사상적·학문적 우위가 뚜렷해진 조선 후기의 인조 24년(1646)에 찬선, 진선, 자의 세 관직을 신설하고 이름난 재야의 학자 즉, ‘산림(山林)’을 초빙·임명하여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게 하였다.

세자 교육의 상징적·학문적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셋째, 춘방의 관료 대부분은 다른 관직을 겸하고 있었지만, 찬선, 보덕, 필선, 진선, 문학, 사서, 설서, 자의 등 7명은 오직 세자 교육만을 담당했다. 이들은 세자와 함께 공부하며 때론 스승이 되고, 때론 벗이 되어 세자 교육의 실질적 효과를 높였다. 넷째, 계방의 관원은 주로 재상급 관료와 공신의 자제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세자의 인맥과 학문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숙종 이후에는 계방 관원도 세자의 공부에 참여함으로써 역할이 더 강화되었다. 세자 교육에는 최고 관직자, 최고의 산림 학자, 재능 있는 관료, 재상과 공신의 자제 등이 참여했다. 이렇듯 세자 교육은 명실상부 최고의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01.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례를 정리한 왕세자입학도 ©국립고궁박물관
02.왕세자입학도에 정리된 의례 내용 ©국립고궁박물관


서연(書筵), 무엇을 어떻게 배웠나?

세자가 춘방, 계방의 관원들과 함께하는 공부를 서연이라했다. 세자의 스승 대우를 받는 좌우부빈객 이상이 참여하는 법강(法講)에서는 유교 경전, 소대(召對)에서는 역사를 주로 공부하였다. 별소대(別召對)와 야대(夜對)는 세자가 필요할 때마다 춘방·계방의 관원을 불러 모아 여는 서연이었다. 또 세자가 11세가 넘으면 가끔(원칙으로는 한 달에 두 차례) 춘방·계방의 모든 관원과 고위 관료들이 모이고 때론 임금도 참석하여 세자의 공부를 점검하였는데, 이를 회강(會講)이라 하였다.

학업의 대체적인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조선 후기 임금 가운데 모범생이었던 정조(正祖)의 경우는 〈표 2〉와 같은 순서로 공부했다. 공부 방법은 이러했다. 먼저 세자가 전날 배운 부분을 읽고 뜻을 해석한다. 그 다음, 새로 배울 부분을 춘방 관원이 먼저 읽고 세자가 따라 읽는다. 이어 춘방 관원이 뜻을 해석해 주면 세자가 따라 해석한 뒤, 다시 세자 혼자서 읽고 뜻을 해석한다. 이후 서연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그날 배운 부분의 뜻과 교훈, 자기 생각 등을 말한다.

세자는 이에 대해 자신이 느낀 점이나 생각을 질의·응답하며 토론한다. 공식 기록으로만 보면 매우 딱딱하고 엄격한 것 같지만, 홍대용(洪大容)의 『계방일기』를 보면 더러 잡담과 세상 이야기를 화제로 삼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자는 작게는 자신의 학문을 성취하고 나아가 유교적 성군(聖君)이 될 수 있는 자질을 키울 수 있었다.


출처: 문화재청 김도환(前 한양대 연구교수,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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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