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석등은 해가 저물고 등불을 켜서 그 불빛이 석등을 통해 사방으로 퍼질 때 가장 화려해진다. 형태적 예술성도 좋지만 조형예술은 그 기능을 다 할 때 예술성이 완성되는 법이다. 이 정도 크기와 형태적 완성도에서 등불이 켜지면 등불이 밝히고 있는 그 공간만큼은 극락이 된다.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중대석을 장구 형태로 만든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전체적 규모에 있어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나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또한 기단부, 화사석 및 지붕과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어 완성미를 더하고 있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석등은 각황전 앞에 위치해 있다. 각황전은 원래 내부에 화엄석경을 봉안한 장육전(丈六殿)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702년(숙종 28) 다시 지어졌다. 각황전은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건립했다는 설과 최치원이 쓴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憲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886)의 내용에 따라 9세기 후반에 건립했다는 설이 있는데, 석등의 양식으로 보아 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 석등은 국내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세부의 조각 수법도 정교하여 신라 석등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호남지역에 널리 유행한 고복형 석등의 선구적 작품으로 신라하대 석조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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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