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청해진 설치한 해상왕 장보고

역사 속 전라도 

청해진 설치한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張保皐)는 787년경 남북국시대에 완도에서 태어난 신라의 해상호족이다. 남북국시대는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병존하던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됐다.


장보고 초상화와  유적지  청해진



장보고는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골품제도와 관계없이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서 군인이 되었다. 서주는 절도사들의 침입이 잦은 곳으로 황허강과 화이허강을 연결한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주둔하던 요새였다. 서주는 현재의 장쑤성 북서부에 있는 쉬저우를 말한다.

장보고는 군인이 되어 승마가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무령군 중소장(武寧軍 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신라에 돌아와서 신라 42대 흥덕왕에게 신라인이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다는 참상을 보고하고 완도에 해상기지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 흥덕왕의 명으로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적을 소탕하고 당나라를 비롯해 왜, 남방, 서역 등 여러 나라와의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 또한 당나라 산둥성에 신라인의 자치주인 신라방과 불교 사찰인 법화원을 건립했다. 장보고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라는 소수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사회도처에서 불만이 증가했다. 왕위다툼으로 36대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이 즉위할 때까지 60여 년 동안 11명의 왕이 교체되는 커다란 혼란을 겪었다.

38대 원성왕의 손자인 김우징이 왕위다툼에서 밀려 청해진으로 피난 왔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서 45대 신무왕으로 추대했다. 장보고는 공로를 인정받아 감의군사로 임명되어 해상권과 더불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신무왕이 즉위한 지 반년 만에 사망하자 신무왕의 아들이 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

문성왕으로부터 진해장군으로 임명받은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다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장보고가 살해되자 동아시아 무역기지로 번창하던 청해진은 24년 만에 사라졌다. 반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청해진의 거주민들은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됐다.


완도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완도 앞바다인 자그마한 섬 장도(將島)에 청해진이 설치됐다. 1959년 태풍 사라가 지나간 자리에 목책이 발견되어 청해진이 확인됐다. 완도에서 장도까지 거리는 약 180m 정도이며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도 있다. 장도의 면적은 축구장 12개 정도이다.

완도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대한민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이며 해남과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와 이어진 최남단 섬이다. 완도군은 완도를 비롯한 264개의 도서군으로 형성됐고 완도읍, 금일읍, 노화읍 등 3읍 9면으로 구성됐다.

완도군에는 대부분이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에 속하며 명승3호인 정도리 구계등의 완도, 청해진유적지 장도, 윤선도유적지의 보길도, 명사십리해수욕장의 신지도, 항일운동의 본거지인 소안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 청산도 등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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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