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전의 역사와 낭만이 복원된 월정교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아내겠거늘 !! "
쪽박을 차고, 누더기를 걸친 원효가  서라벌 거리를 떠돌면서 씨부렁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무열왕만은  풍문으로 들려오는
원효의 말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자루빠진 도끼"라.......  하늘을 받칠 기둥이라........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구나! 그런데 누구를 원효의 배필로 주어야 할까?
한참을 고심하던 무열왕이 무릎을 딱! 칩니다. 결혼한지 사흘만에 청상이 된,
둘째 딸 요석이 떠 올랐던 것이지요. 예전에 원효가 대궐에 드나들 때,
원효와 마주친 요석이,  싫지 않은 눈빛을 보낸것도 알고 있었고,
원효에게 선물을 건넨것도 부왕이 알고 있었지요.
 
왕이 공주를 부릅니다.
원효대사가 장가를 들고 싶어 하시는구나.
네가 배필이 됨이 어떠하냐?
요석은 말없이 발 끝만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싫지 않다는 뜻으로 알겠다.
무열왕은 요석궁에다 원앙금침을 깔아줍니다.
그리고 주안상이 들어갑니다
 
달빛마져 구름속으로 숨어버린 밤.
반쯤 취한 원효가 요석의 손목을 끌어당깁니다.
요석 또한 3일간의 신혼생활이었지만  이미 사내와의 희열 넘치는 정분을 아는지라
뜨거워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끌려갑니다.

원효가 말합니다.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는데  자루빠진 도끼가 어디 없을까요? 허허 "
그러자 요석공주가 조용히 웃으며,
“대사님은 불심만 깊으신 줄 알았는데  목수일도 하시나 봐요? 호호 "
 
원효가  화답합니다.
“허허 물론이지요~  다만 하지 않을 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옛날 부처님의 큰 제자인 아난도 마등(冕)이라는 여자것을 빌려 쓴 적이 있지요 ”
 
요석이 재미있다는 듯 눈빛을 보내며 말합니다.
“그럼 대사님께서도 음사(淫事)의묘미(妙味)를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
이에 원효가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 하지요.
"생지안행(生知安行)입니다.  인간은 태어나 배우지 않아도 쉽게 행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둥을 깎는다는 것은 그런것이 아닐런지요? "
 
요석공주의 입안에 침이 마릅니다.
"호호 그러시다면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 드릴수도 ..... "
요석이 원효의 품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운우지락의 늪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인생사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꿈 같던 사흘 밤낮이 지나지 원효가 요석에게 작별을 합니다.
 
원효의 넓은 가슴에 안긴 채. 가슴을  쓰다듬는 요석공주.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대사의 가슴에
티끌보다 작고 먼지보다 작은 소저가 기댈곳은 없는지요?"
 
원효가 말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어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머물 자리가 어디 있겠소?"
 
공주를 조용히 내려보던 원효가 일어나  바랑을 챙깁니다.
공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며,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냅니다.
 
그렇게 원효를 떠나보낸 공주는
배가 불러오고 열달후에 아들 "설총"을 낳았지요.

한편 요석공주와 열락의 밤을 보낸 원효는 스스로 파계했기에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서라벌을 떠나, 팔도를 유랑합니다.

그러다가 양주근처를 지날무렵,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삶이 꿈을 꾸는것과 같다는 이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소요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의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사랑은 집요한 것.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법.

원효의 자재무애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요석은 원효를 떠나지 못합니다.
원효가 정진하고 있는 소요산 입구에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원효를 먼 빛으로 바라보며 그리워합니다. 
그 터가 지금도 "요석공주별궁지"로 남아 있지요.
동두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궁지 옆에 요석공원을 만들어놓고
소요산의 한 봉우리를,
"공주봉"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답니다.
 
원효는 70세 되던해 음력 3월30일 열반에 듭니다.
 
욕망에 집착하면,  사랑은 죄가 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욕망은  진리로 가는 해탈문이 된다.
사랑 때문에 극락에도 갈 수 있고,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다.
 
범부의 사랑이야 극락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과정이지만,
위대한 선사의 사랑은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한 여인과 더불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보살도였으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자유의 길이었다.
 
그런 원효의 금란가사를 벗기고,  민중속으로 인도한 대보살이
바로, 요석이었던 것이다.

범부의 삶과 부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우리에게 온몸을 던져 가르쳐 주신분이 원효스님이십니다.


1300년전의 역사와 낭만이 복원된 경주 월정교
10년만에 복원되어 공사하는 천막을 걷어내고 모습을 야밤에 드러냈다.
신라왕국인 월성과 남산을 잇는 대표적 다리로 2018년 대한민국 국토대전 역사문화건축 부문에서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요석궁은 월정교터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터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집터로 바뀐 뒤에 현재는 음식점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문천(蚊川)에서는 지금도 고둥 등을 줍는 아낙들이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기자가 이곳을 방문했을때는  10월3일 열리는 신라문화제에 월정교를 개방시키는 공사로 인하여 월정교내부는 둘러보지는 못했다.


글사진 :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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