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사형선고 절대 잊으면 안되는 이유

편의점, 마트, 백화점 앞 진열대에는 형형색색의 초콜릿으로 가득합니다.

 

그 앞에는 초콜릿을 고르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2월14일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입니다. 초콜릿 제조판매업자들의 상술을 떠나 이날 초콜릿을 판매하고 사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밸런타인데이에 앞서 ‘안중근 의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제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날입니다.

지난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안 의사는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간 후 의병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민족의 원횽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만주 하얼빈역의 플랫폼에 기차 한 대가 들어오자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이 그 주위를 에워쌌습니다. 이윽고 기차에서 긴 수염을 흩날리며 이토 히로부미가 내렸고, 의장대의 팡파레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천지를 뒤흔드는 총성이 잇따라 울려 퍼졌고, 환영인파로 가득한 플랫폼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이토를 비롯한 일본 귀빈 네 명이 차례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군중 속에서 만세 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조선 청년 안중근이었습니다.

 

그는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후 권총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태극기를 꺼내 ‘코리아 뷰레’(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습니다. 국권을 침탈한 원흉이었던 이토는 이렇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거사 후 러시아 군대에 압수된 권총과 안 의사의 권총 보관함 (일본인 소장)

 

이날 안중근은 총 일곱 발의 총탄을 발사했습니다. 이중 세 발이 이토의 가슴에 작렬했고, 나머지 세 발은 이토의 수행원들의 몸에 명중했습니다.

이토오의 왼쪽에 섰던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총영사 ‘가와카미 토시히코’가 오른 팔 골절 관통상을 입었고, 또 한 발은 이토의 오른쪽에 섰던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의 왼쪽 허리를 관통하여 복부 피하에 박혔습니다.

 


                             @안 의사의 총탄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의 피묻은 셔츠.


 

국내대신 모리의 곁에 섰던 남철도주식회사 이사 ‘타나카 세이지로’의 왼쪽 다리 관절이 관통되었으며, 남만철도주식회사 총재 ‘나카무라 제코’의 외투를 뚫고 총탄이 오른편 바지에 박혔습니다. 나머지 한 발의 소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졸속 재판... 일본 각본대로 사형 선고

 

이후 안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는데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재판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들의 각본대로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징역 3년형이 적당하다고 변론했던 사실이 최근 확인됐습니다. 이토 살해 혐의로 기소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에서 일본인 변호사들은 재판부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오늘날 법의 목적인 형평성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일본)를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를 살해하려한 자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고 (1904년 미국에서) 스티븐스를 죽인 암살자(장인환 의사)도 단지 25년형이 구형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은 처음부터 안 의사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중국 뤼순 감옥에 있는 안중근 의사 사형장.

 

안 의사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습니다. 살기 위해 거사에 나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 의사는 공소를 포기했습니다. 안 의사의 모친은 아들에게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안 의사는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 감옥에서 저술에만 힘썼습니다. 이곳에서 집필한 <안응칠역사>는 안 의사의 자서전입니다. ‘응칠’은 안 의사 또 다른 이름입니다.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으로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했습니다. 일제는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동양평화론> 저술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지 42일 만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소원 “국권이 회복되는 날 나를 고향땅에 묻어 달라”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민족의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안 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마지막 소원을 남겼는데요. “국권이 회복되는 날 나를 고향땅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70년 전인 1948년

에 광복이 됐지만 안 의사의 소원은 허공에 맴돈 지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일제는 안 의사를 처형한 후 무덤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 매장했다는 매장지도 비밀에 부쳤습니다. 안 의사의 무덤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전국 곳곳에서는 ‘안중근 없는 기념식’만 형식적으로 치르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입니다. 일본은 안 의사가 이토에게 쏜 총알과 당시 이토가 입고 있던 피 묻은 셔츠까지 보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고 있습니다.


                                                       @뤼순감옥 입구.

 

그런데 필자는 몇 년 전 중국 뤼순(여순)에 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2012년 10월 뤼순감옥을 찾았는데, 중국은 안 의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뤼순 감옥에 입장하려면 25위안, 안중근기념관에 들어가려면 20위안 등 당시 우리 돈으로 약 8000원을 내야 했습니다.

 

중국은 돈벌이에 이용, 우리는 형식적 기념식만 치러

 

더욱 놀란 것은,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국권이 회복되는 날 나를 고향땅에 묻어 달라”는 안중근 의사의 소원은 영영 이룰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안 의사가 후손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입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비춰주는 오늘의 거울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힘차게 열심히 살아야지만, 오늘이 잊게 만든 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밸런타인데이’ 보다 ‘안중근 의사 사형일’인 오늘을 더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출처: [정락인닷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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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