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중탑수복완성법요식

五重塔修復完成法要
 

오중탑수복완성법요(2017.1.16)

2015년 4월에 착공한 오중탑 수복공사가 완료되어 오중탑수복완성 법요가 거행되었습니다. 

                                                       사진 : 신도님 제공


享保年間に、第26世日寛が「東洋広布」を望み、徳川6代将軍家宣夫人、天英院とともに起塔の志を立てその基金を残した事に始まる。その後、第31世日因が庶民に仏道に入るように勧めて得た寄金と、亀山城主・板倉勝澄の供養によって、1749年(寛延2年)6月に建立された。内部には、31世・日因が1749年2月28日に書写した本尊が安置されている。

大石寺における堂宇(堂の建物)はすべて南向きに立てられ、須弥壇(本尊を安置する台)は本堂の北側に安置され、本尊が南側から太陽の光を浴びるように作られている。これは、日本古来の「君子南面」(南に向かって座るのが上座)の風習にならったものである。

しかし、この五重塔に限っては、日蓮の「月氏の仏法(月氏=インドの意、すなわち釈迦仏法のこと)は西から東にわたってきたが、久遠元初の本法である日蓮の仏法は東から西(日本から中国・インド)に広まる」(諌暁八幡抄趣意)という記述を受け、大石寺境内で唯一西向き(中国・インド向き)に立てられている。

1953年(昭和28年)、老朽化も甚だしい時に、創価学会会長(当時)であった戸田城聖が64世日昇上人に修復の寄進を申し入れ完成した。その後1966年(昭和41年)6月(66世日達の代)6月11日に国の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た[1]。この翌年には修復工事が行われた。

東海道一の規模で、高さは34m。毎年2月16日(日蓮の誕生日)には五重塔を開け、法主の大導師による「御塔開き」のお経が行われる。また、この五重塔のそばには、修復に貢献した戸田城聖の墓がある。


교호 연간에 제26세 일관이 "동양 광포"을 원하는 도쿠가와 6대 쇼군의 부인 천영원과 5중탑 불사의뜻을 세우고 그 기금을 공양하고 시작된다. 그 후 제31세 니치임 상인이 서민에 불도에 들도록 권하고 얻은 기금과 카메야 성주·이타쿠라 카츠즈미 공양으로 1749년(간엔 2년)6월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31세, 니치임 상인이 1749년 2월 28일에 서사한 본존이 안치되고 있다.

오오이시 테라의 당우(당 건물)은 모두 남향에 세워지고 수미단(본존을 안치하는 다이)는 본당의 북쪽에 안치됐으며 본존이 남쪽에서 태양빛을 받게 만들었다. 이는 일본 고래의 "군자 남면"(남쪽으로 향하고 앉는 것이 상석)의 풍습에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 오층 탑에 한해는 니치렌의 "월지의 불법(월지=인도의 뜻, 즉 석가모니 불교의 것)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왔지만, 구도 원초의 본법인 니치렌의 불법은 동쪽에서 서쪽(일본에서 중국·인도)에 퍼져"(동효만 뜨고 취지)이라는 기술로 오이시사 경내에서 유일하게 서향(중국·인도 방면)에 세워지고 있다.

1953년(쇼와 28년), 노후화도 심할 때에 창가 학회 회장(당시)이었던 도다 조세이가 64세 일승 상인에 복원의 시주를 청해완성했다. 그 후 1966년(쇼와 41년)6월(66세 일달의 대)6월 11일에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1]. 이 이듬해에는 복원 공사가 이뤄졌다.

동해도제일의 규모로 높이는 34m, 매년 2월 16일(일련의 생일)에는 오층 탑을 열고 법주의 대도사에 의한 "미사 탑에서 "의 불경을 한다.또 이 오층 탑의 옆에는 복구에 기여한 도다 조세이의 무덤이 있다.

                                 도다 조세이 무덤: 사진 신도님 제공




                                          대석사에서 전시중인 오중탑전   ↓


 편집부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