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식 박사가 최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자신의 신학 세계와 인생 스토리를 전하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지구촌의 환경이 더 오염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중국 진나라 시인 도연명은 주야장천 술에 취해 거문고를 끼고 살았던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거문고에는 줄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줄이 없어 별무소용인 이 거문고를 가리키는 단어가 ‘소금(素琴)’이다. ‘소금’은 한국 신학의 거목으로 통하는 유동식(94) 박사의 호(號)이기도 하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만난 유 박사는 “언젠가 도연명의 전기를 읽다가 소금과 관련된 내용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며 “고희(古稀)를 넘긴 뒤 ‘소금’을 호로 사용했다”고 했다.
“술에 취해 일평생 줄 없는 거문고를 끌어안고 산 도연명의 삶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삶…. 내 인생 역시 다를 게 없었어요(웃음).”
유 박사는 1960년대 토착화 신학 논쟁의 시동을 걸었던 인물이다. ‘풍류신학’이라는 독창적 신학 세계로 한국 신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가장 독창적인 신학 업적을 남긴 학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굴곡진 인생 역정과 한국교회를 향한 고언을 전했다.
유 박사는 1922년 황해도 평산 남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모 때부터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10대 시절부터 신학자의 길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숙부가 “취직을 하려면 문과가 아닌 이과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권해 40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이과에 진학했다.
일제강점기, 윤동주, 전쟁, 그리고 복음
당시 이 학교에는 시인 윤동주가 재학 중이었다. 유 박사는 “윤동주씨는 선배였는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해 오다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곤 했다”고 회상했다.
“교내에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그룹이 있었어요. 하지만 윤동주씨는 거기에 끼지 않더군요. 사실 학교 다닐 때는 그분이 크리스천인지, 시를 쓰는지도 잘 몰랐어요.”
이과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2년 만에 결국 학교를 그만뒀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1년간 준비해 43년 일본 도쿄 동부신학교에 들어갔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였다. 세상의 풍파 앞에서 개인은 무력했다. 이듬해 학도병으로 징집된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유 박사는 “2차 대전이 더 지속됐다면 난 분명히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배치된 곳이 일본 규슈 가고시마 해안에 있던 부대였는데, 맡은 임무가 위험천만했다.
“당시 저에게 떨어진 역할은 해안에 구멍을 파서 숨어 있다가 미군 탱크가 오면 지뢰를 안고 탱크로 돌격하는 거였어요. 정말 무모한 일이었죠. 히로시마 등지에 원자탄이 떨어지면서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았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줬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하나님의 존재를, 복음의 실체를 실감한 것도 이때였다.
“저는 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주님이 구해주셨어요. 복음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때 복음이 뭔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 그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한국인 영성은 ‘풍류’에 …풍류신학의 탄생
해방 이후 서울 배화여고 등지에서 교편을 잡다가 59년 감리교신학대 교수에 임용됐다. 신학계에 그의 이름이 알려진 건 62년 ‘감신학보’에 ‘복음의 토착화와 선교적 과제’라는 글을 발표하면서였다. 한국문화의 자장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자 신학계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독교사상’ 등 기독 잡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유 박사는 풍류신학이라는 신학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민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는데 한민족이 받은 은사는 멋스럽게 노는 예술적 능력, 즉 ‘풍류(風流)’라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건 정신을 형상으로 그려내는 건데, 우리 민족이 이것만큼 잘하는 게 없어요. 정치는 꼴등인데 예술은 1등이에요(웃음). 올해에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했잖아요. 한국인의 민족성과 종교사를 이해하려면 풍류의 은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서에 담긴 뜻을 우리네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서 읽어내는 독특한 독법은 급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 박사는 저작 ‘풍류도와 예술신학’(2006)에서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이렇게 적었다.
‘새천년 시대의 종교는 그 간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느냐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대상은 불상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상일 수도 있다. (중략) 석굴암은 불교 미술의 결정체요, 우리 문화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하나님의 묵시가 담겨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99쪽)
“한국교회, 복음이 뭔지 제대로 전해야”
유 박사는 73년 연세대 신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연세대 재직 시절 그는 교내 불교 동아리 지도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불을 참관하고 템플스테이도 체험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불교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아무도 지도교수를 안 맡으려고 했어요. 연세대가 기독교 계통 학교여서 교수들이 부담스러웠던 거죠. 하지만 저는 신학과 교수이니 불교신자라는 오해를 살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도교수로 활동한 겁니다. 아마 목사 안수를 받은 교수였다면 교단에서 파면 당했을 거예요. 평신도 신분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죠(웃음).”
유 박사는 88년 은퇴했다. 현재는 연세대 후문에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 이대 영문과 교수였던 아내는 퇴직한 뒤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다 2004년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유 박사는 정정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부좌를 틀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식사는 10가지 잡곡으로 만든 생식가루를 두유에 타서 먹는 것으로 갈음한다. 그는 “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며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말미에 한국교회에 바라는 점을 물었을 때는 “복음을 제대로 알고 전해야 한다”고 답했다.
“정치나 장사를 하는 교회들이 많아요. 그런데 교회라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교회는 복음에 입각한 신앙인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들은 저마다 이 조건을 갖췄는지 자문해봐야 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서점에 들렀다가 유 박사가 필진으로 참여해 지난 5월 발간된 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등과 공저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였다. 책에서 유 박사는 자신의 신학세계와 인생 스토리를 소개한 뒤 자필시 ‘하늘 나그네’로 글을 끝맺었다. ‘하늘 나그네’에는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주님만 의지한 신학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기사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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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