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국장 추진과 국장 관련 의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왕이나 왕비 등 왕실 인물이 승하한 후에 추진하는 국상(國喪) 관련 의례였다

왕실의 국장 추진과 국장 관련 의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왕이나 왕비 등 왕실 인물이 승하한 후에 추진하는 국상(國喪) 관련 의례였다. 왕이나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라 하였고,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하였다. 왕이 승하하면 당일에 국장을 집행할 임시관청인 도감(都監)이 설치되었는데, 국장을 총괄하는 국장도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하는 빈전(殯殿)도감,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山陵)도감, 그리고 국장을 마친 후 궁궐 내에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에 관한 일을 맡은 혼전(魂殿)도감이 구성되었다. 각 도감에서는 추진한 업무 내용의 전 과정을 의궤(儀軌)로 정리하였는데, 현존하는 의궤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장 관련 의궤이다.


          00.『정조국장도감의궤』대여 부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왕이 승하하면 바로 국장도감을 설치하고, 국장의 절차를 총괄하였다. 국장도감에서는 먼저 빈소인 빈전을 마련하고, 성복(成服: 상주가 상복을 입음), 발인(發靷: 관이 궁궐을 떠남), 하관[下棺: 관을 산릉의 광중(壙中)에 내림], 반우(返虞: 신주를 궁궐로 가져옴) 후 국장도감을 해산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왕이 승하하면 가장 먼저 한 의례는 내시가 왕이 평소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으로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이라고 외쳤다. 왕세자 이하 신하들은 머리에 썼던 관과 입었던 옷을 벗고 머리를 풀었다. 대신 흰색의 옷과 신발, 버선을 착용하며,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민간에서도 왕의 승하를 애도하여 5일 동안 시장을 열지 않고 결혼과 도살 등도 금지하였다.

왕의 시신은 목욕을 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襲), 옷과 이불로 시신을 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斂)을 행한 후에 찬궁(欑宮: 재궁을 담은 큰 상자)에 넣은 재궁(梓宮: 가래나무로 만든 왕의 관)을 빈전에 모셨다. 찬궁은 재궁을 장지인 왕릉까지 운반하는 의식인 발인 중에 하룻밤을 묵어가는 숙소인 행궁(行宮)이나, 왕릉 내에서 제사를 올리는 장소인 정자각(丁字閣) 등에도 각각 설치하였다.

          01.『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청룡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02.『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백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왕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에는 찬궁의 모습과 함께 찬궁 4면의 동서남북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성복은 대렴 다음날 거행하였으며, 새로운 왕의 즉위식은 성복이 끝난 후에 거행하였다. 따라서 조선 왕의 즉위식은 대부분 선왕의 장례식에 수반된 행사로서, 경축할 만한 의례가 아니었다. 국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간략한 즉위식 행사가 거행된 것이었다. 아버지 태종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진행한 세종의 즉위식이나, 중종이나 인조처럼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 정도가 좋은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03.『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주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04.『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현무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장도감은 본부에 해당하는 도청(都廳)과 업무를 분장하여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으로 조직하였고, 그 하부에 다시 별공작, 수리소 등의 기관이 있었는데 부서별로 따로 의궤를 작성하였다. 『도청의궤』에는 장례 일정과 국장을 담당한 관원의 명단, 장례에 대한 왕의 명령, 국장도감에서 왕에게 올린 각종 보고서, 국장도감과 다른 기관 사이에 오간 공문, 시호의 책봉, 장례 절차, 소요 비용, 장례 후 시상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방의궤』에는 대여(大輿)·견여(肩輿)·요여(腰輿)와 같은 가마와 향로를 실은 향정자(香亭子) 등을 제작하고 조달한 내역을 밝히고 있다.

          05.『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표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방의궤』와 『삼방의궤』에는 각 방의 담당 업무, 물품의 재료와 제작 방법, 소속 장인의 도구와 재료, 참여한 장인의 명단 등이 실려 있다. 이외에 우주소(虞主所)에서는 우제(虞祭)에 쓸 신주와 관련 물품 제작, 표석소(表石所)에서는 산릉에 세울 비석의 제작, 지석소(誌石所)에서는 장명등(長明燈) 밑에다 매장할 지석의 제작을 담당했다. 별공작(別工作)에서는 크고 작은 상여와 의장, 비석을 보관할 가건물, 지석을 넣을 상자, 책상과 촛대를, 분장흥고(分長興庫)에서는 깔개와 우비를, 분전설사(分典說司)에서는 해를 가리는 차일(遮日)과 평지에 둘러치는 휘장을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도감의궤』를 통하여 국장에 필요한 물품 제작 및 관련 기관에서 주고받은 공문서, 소요된 재료, 참여한 장인의 명단 등을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다.

          06.『정조국장도감의궤』 악기궤를 싣고 가는 채여 부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07.『정조국장도감의궤』 곡을 하는 궁인들이 뒤따르는 모습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08.『정조국장도감의궤』 채색된 악기가 그려진 악기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발인이 시작되면 왕의 관은 궁궐을 떠나 미리 정해 놓은 왕릉지에 도착하였다. 『국장도감의궤』에는 5개월에 걸친 국장의 가장 중요한 장면인 발인 행렬을 담은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가 그려져 있다. 빈전을 나와 산릉에 이르기까지 왕의 시신을 모신 대여(大輿)의 행차가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1800년(정조 24)에 있었던 정조의 국장 행렬에는 총 40면에 걸쳐 1,440명의 인원이 그려진 모습이 나타난다. 행렬의 앞부분에는 길을 인도하는 도가(導駕)와 선상군(先廂軍)이 위치했다. 왕이 평상시에 사용하던 의장이 다음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장 때 특별하게 사용하는 방상시(方相氏), 죽산마(竹散馬) 등의 흉의장(凶儀仗)과 함께 황룡기(黃龍旗), 천하태평기(天下太平旗) 등 길의장(吉儀仗)도 배치하였다.

길의장을 배치한 것은 돌아가신 선왕의 혼을 모신 신연(神輦: 왕의 가신주를 모신 가마)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연의 뒤로는 산릉에 부장할 각종 의물(儀物)을 실은 채여(彩輿)가 따랐다. 각종 부장물을 실은 가마의 뒤에는 애책문(哀冊文)을 실은 애책 채여가 따르고 그 뒤에는 견여(肩輿)와 대여(大轝)의 행렬이 이어진다. 견여는 빈전에 안치되었던 재궁을 대여에 모실 때까지, 그리고 산릉에 도착하여 능 위에 올라갈 때 사용하기 위한 작은 가마이다. 왕의 재궁을 실은 대여의 좌우에는 보(黼), 불(黻) 등 왕을 상징하는 의물과 촉농(燭籠)이 늘어서고, 그 후미의 좌우로는 만장(輓章)과 곡을 하는 궁인들이 뒤를 따랐다.

왕의 관이 장지(葬地)에 도착하면 관을 정자각에 모신 후 찬궁에서 관을 꺼내어 하관하였다. 하관을 할 때는 사전에 설치한 녹로(轆轤) 등의 기계를 이용하였다. 왕의 재궁을 광중에 부장할 때는 여러 기물과 악기 등의 명기(明器)와 복완(服玩: 옷과 몸치장에 필요한 물건)을 함께 묻었다. 명기나 복완을 부장한 것은 죽은 이가 사후에도 생전의 생활을 누리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악기궤(樂器櫃)라 하여, 금슬(琴瑟), 종(鐘), 생(笙), 고(鼓), 축(竺), 어(敔) 등 11종의 악기의 배치도와 함께 채색의 악기 모습이 그려져 있음이 나타난다.

숙종이 승하하자 음식도 거부한 채 죽은 금묘(金猫: 누런색 고양이)를 숙종의 무덤인 명릉(明陵) 근처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최근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다. 왕릉 조성의 과정을 담당한 기관은 산릉도감이었고, 산릉도감에서는 의례가 끝나면 『산릉도감의궤』를 제작하였다. 왕릉의 조성이 끝나면 우제(虞祭: 시신을 매장한 후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가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에 두었다. 혼전을 조성하고 혼전에서의 의례 내용은 『혼전도감의궤』로 남겼다. 3년이 지나면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 의례를 진행했고, 부묘의 과정 역시 『부묘도감의궤』로 남겼다. 국장과 관련한 의궤를 세분하여 작성한 것에서, 그만큼 국장이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였던 의례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글.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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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