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으로 가는 절 도피안사

도피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상과, 보물 삼층석탑을 봉안하고 있는 천년 사찰이다.

피안에 이르는 도피안사

도피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상과, 보물 삼층석탑을 봉안하고 있는 천년 사찰이다.

화개산 도피안사(花開山 到彼岸寺)라는 편액이 높다란 일주문에 걸려있다. 꽃이 핀다는 산 이름인데 이 한겨울에 꽃을 보기는 무리고 산에는 백설만이 덮여있다.

865년(경문왕 5) 승려 도선(道詵)이 지역 신도 1,500명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에 절을 창건하고 보물인 삼층석탑과 국보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새로 단청한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도피안사의 본 법당이다. 이곳에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광배는 없다. 높이 91cm로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과 같다는 느낌이다. 불두와 몸체가 전반적으로 갸름한 형태이며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인 지권인,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말아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상호에서 눈을 가늘게 처리하고 눈동자는 표현하지 않았다. 나발(螺髮 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조각한 반면 육계(肉髻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살덩이)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지 않아 전면에서는 확인되지 않을 정도이다. 목 부분의 삼도도 두 줄만 확인된다. 법의는 통견(通肩 양어깨를 모두 법의로 덮은 양식)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을 두텁게 감싸 안았으며 옷 주름을 평행선처럼 처리하여 사실성보다는 형식적이고 도식적으로 처리하였다. 대좌는 3단인데, 상단은 단판의 앙련을, 하단은 귀꽃이 달린 복련을 조각하였고, 중단은 8각의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풍성한 양감보다는 세장한 형상을 띠고 있어 왕경이었던 경주의 8세기대 전형적인 불상이 풍만하고 안정된 형상을 띠고 있던 것과 대비된다. 상호를 보면, 젊고 강인한 모습이면서도 자비롭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어 신라 말 철원 지역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고 보인다. 신라 중대 그리고 중앙에서 석불이 조성된 것과 달리 당시 지방에서는 철불이 유행하였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가슴 부분을 경계로 하여 윗쪽과 아래쪽을 주조한 다음 이어 붙였으며 그 경계가 남아 있다. 좌우 협시불을 두지 않았으며 여느 절과 달리 불단이 번잡하지 않고 무척 정갈하다. 향로와 정화수 촛대 하나뿐이다. 닷집은 화려하나 탱화와 잘어울리는 붉은 배색으로 거북함이 없다. 오히려 탱화 속 부처와 보살들을 어둔 초록색으로 칠하여 더 영롱하다.

불상의 등에는 865년에 도피안사 주위에 거주하던 신도 1,500명이 결연하여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철원군의 도피안사에 안치하였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9세기 이후에 신라 불교가 지방으로 전파되어 대중화되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판독문은 다음과 같다.

(香徒佛銘文幷序 夫釋迦佛 晦影歸眞 遷儀越世 紀世掩色 不鏡三千光歸 一千八百六載耳 慨斯恠斯 彫此金容 □□來哲 因立願之 唯願卑姓室 遂棨椎自擊 □□覺長昏 換庸鄙志 契眞源 恕以色莫朴□見 唐天子咸通六年乙酉正月日 新羅國漢州北界鐵員郡到彼岸寺 成佛之時 士□龍岳堅淸 于時□覓居士 結緣一千五百餘人 堅金石志 勤不覺勞因.. 향도불명문병서 부석가불 회영귀진 천의월세 기세엄색 불경삼천광귀 일천팔백륙재이 개사괴사 조차금용 □□래철 인립원지 유원비성실 수계추자격 □□각장혼 환용비지 계진원 서이색막박□견 당천자함통륙년을유정월일 신라국한주북계철원군도피안사 성불지시 사□룡악견청 우시□멱거사 결연일천오백여인 견금석지 근불각로인.. 이를 통해서 당나라 연호로 함통 6년, 즉 신라 경문왕 5년(865)에 한주 북쪽에 있던 철원군에서 불교 신자 1,500여 명이 향도를 이루어 이 불상을 조성하였고 도피안사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의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 상을 제작하여 철원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기 위해 운반하던 도중 불상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사라진 불상이 지금의 도피안사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도선이 그 자리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철조비로자나불상이 피안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절의 이름을 도피안사로 지었다고 한다. 피안(彼岸)이란 해탈한 후의 내세라는 뜻이다.

이후 1898년(고종 35)에 화재를 입어 당시의 주지 월운 스님이 재건하였고, 1941년에는 주지 김의권에 의해 신축 및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도피안사는 통일 신라의 일반적인 사찰 건축양식과 다른 형태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통일 신라 사찰 건축양식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한편 도피안사는 일제 강점기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조직 결성지로도 알려져 있다. 6·25전쟁 때 화재로 완전히 폐허가 된 도피안사를 1957년 이명재 소장과 육군 제15사단 장병들이 재건하여 관리해 오다가 1986년부터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대적광전, 극락보전, 설법전, 삼성각 등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된 대적광전 앞에 세워져 있는 보물 삼층석탑은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배면 명문에 신라 경문왕 5년(865)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밝혔으므로 삼층석탑 역시 그 당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단부에 연화 좌대가 설치된 것을 근거로 삼아서 고려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탑신부는 방형의 3층을 이루고 있다. 옥신석과 옥개석이 한 몸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석 네귀퉁이에 우주를 표현하였다. 층급받침은 1층이 4단, 2층과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부의 높이가 높고 2층, 3층으로 올라가면서 체감율이 일정하게 적용되어 안정감이 떨어진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다. 기단부는 크게 보면 2성 기단이지만 여러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최하단부는 방형의 지대석이 받치고 있고 위에 8각의 기단석이 이중으로 놓여 있다.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불상의 연화 대좌와 같은 상층 기단을 올렸다. 상층 기단의 하부는 16장의 복련을 조각하였고 중부는 8각의 기둥, 그리고 다시 상부에 16장의 앙련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의 위에 한 장의 갑석과 괴임석을 놓고 위에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전체 높이는 4.1m이다.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고 3층 옥개석과 받침돌이 일부 훼손되었다. 상륜부는 노반부만 남고 유실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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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