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상당산성 上黨山城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으로는 이곳 상당산성, 부산의 금정산성,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이 있다.

청주상당산성 上黨山城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고 면적 180,826㎡이다,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당산성은 1716년(조선 숙종 42) 이전에 남아 있던 토성을 돌로 고쳐 쌓고, 그 뒤 몇 차례 중축과 개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아들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축성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 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던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축성기록에 ‘상당기지 개석축 上黨基址 改石築’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된 정맥으로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끝맺는 정맥이며, 한남금북으로 이어주어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文殊山)과 서남쪽으로 태안반도 안흥까지 이르는 산맥의 옛 이름이다. 산경표(우리나라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나누고, 1,650여 개의 산과 지명을 표기한 옛 지리책이다)에서 규정한 1대간, 1정간, 13정맥 중의 하나로, 해발 400~600m의 산들로 연결되었으나 때로는 100m의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괴산, 음성, 충주 등 중원의 남한강 지역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보은, 청주, 증평, 진천 등 금강 북부지역이 생활 문화권을 영유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었지만, 현재는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의 자연스러운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으로는 이곳 상당산성, 부산의 금정산성,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성으로는 역시 남한산성을 꼽을 수 있으며, 금정산성 쪽은 일제강점기 때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서 성곽 훼손이 심하여 이곳 상당산성처럼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다. 성곽의 보존상태는 남한산성이 훨씬 더 뛰어나다. 하지만 주변 환경에 있어서는 상당산성이 훨씬 더 조선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을 유추하기가 쉽다.

이 산성은 상당산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산맥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해 꺾여서 합쳐지고 있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수직으로 쌓아 그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쌓아 다졌다. 비교적 유구가 잘 남아 있는 4.2㎞의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약 3∼4m에 이르지만,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성가퀴(城堞: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서 4벽 중에서 서벽이 가장 높고, 장대 포루가 배치된 점으로 보아 이 성의 방어 요지가 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것임을 알 수 있다. 충청북도와 대전광역시 일대는 소위 한반도의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인 5~6세기의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關防施設 국경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진(鎭)이나 영(營), 보(堡), 책(冊) 등 군사적 목적의 시설)이 굉장히 많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 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다. 정문인 남문 주변에는 3개의 치성과 장대, 4곳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년)에 중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년)부터 영조 23년(1747년)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1802년(순조 2) 1,176개의 첩(堞)을 시설하고,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으며, 관아건물과 장대, 포루, 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어 산성으로서의 완벽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으나, 그 뒤 성벽이 퇴락하고 문루가 모두 없어져 버렸으나 근세에 들어와 1971년 석축 부분을 개축하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인 공남문, 서문인 미호문, 동문인 진동문의 누문을 모두 복원하였다. 1992년 말에는 동장대 역할을 했던 동화정(棟和亭)도 재건되었다. 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 역할을 했던 제승남(制勝堂)의 규모(15평)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동쪽암문,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화정(동장대)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兵馬虞侯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외관직)를 두어 이곳을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娘臂城)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산성을 따라 걸으면 높낮이가 거의 평탄한 길이고, 주변 아름다운 풍경과 조경도 조화를 잘 맞추어 조성하였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청주 시내가 시원하게 들어오며, 조선 시대의 성곽이며 산성 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산성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 걷기 좋은 옛 길 산책로가 또 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성 골짝을 작게 감싼 섬, 방죽을 만나게 된다. 참 아름다운 환경이다. 성내 안쪽에는 한옥마을이 있어서 여러 가지 토속음식들을 판매한다. 전통주와 손두부, 빈대떡을 먹고 나서 성내 방죽 옆에 조성된 자연마당에 두꺼비가 노는 다랭이 논, 유채밭, 연꽃군락지, 생태습지, 청보리밭을 만날 수 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