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소박했던 고기잡이 어살(漁箭)

어살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 예를 들어 돌을 쌓거나 나무기둥을 세운 후 대나무 발[竹簾], 죽렴을 촘촘하게 쳐서 밀물 때 연안으로 왔다가 썰물 때 돌아가려는 물고기를 가두어서 잡는 것이다.

선조들의 소박했던 고기잡이 어살[漁箭]

『고려도경』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물을 사용하는 것이 서툴고, 다만 썰물 때 해안에서 조개와 새우 등을 채취했다고 한다. 사실 상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해산물이 상품으로 유통되기 어렵다. 조선 전기까지도 해산물이 대량으로 유통될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굳이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물고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시기 연안어업을 대표하는 어법은 어살[漁箭]로 살[箭], 또는 방렴(防簾) 등으로 불렸다.

    남해 지족해협 죽방렴. 지족해협은 시속 13~15km의 거센 물살이 지나는 좁은 물목으로 멸치를 대표어종으로 한다.

일상 속 재료로 물고기를 잡는 어살

어살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 예를 들어 돌을 쌓거나 나무기둥을 세운 후 대나무 발[竹簾], 죽렴을 촘촘하게 쳐서 밀물 때 연안으로 왔다가 썰물 때 돌아가려는 물고기를 가두어서 잡는 것이다. 문헌에는 ‘어전(漁箭)’이라 표기 했으나, 실제로는 ‘어살’이라고 발음했다.

어살은 주로 서해안과 전라도 연안에 많이 분포했다. 갯벌에 통나무를 세우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때로는 해변에서 바다 쪽으로 흙을 쌓고 둑을 만들어 일부 구간에만 대나무 또는 싸리나무 등을 엮은 발을 치거나 ‘삼으로 짠 그물’을 치기도 했다. 바다에 돌을 쌓는 방법도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독살’, 제주도에서는 ‘원담’ 또는 ‘갯담’, 경상도에서는 ‘돌발’이라 했다. 다만 동해안이나 경상도에서는 삼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만 또는 강 하구에 대나무 발을 설치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경상도 연안에서는 주로 산란하려고 연안으로 이동하는 대구와 청어 또는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은어 등을 잡았다.

               02.보물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나타난 어살 모습 ©문화재청     

               03.전북 고창 만돌마을 들장은 갯벌에 말뚝 을  박고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다.     

               04.남해 지족해협 죽방렴의 발통 외부 모습


상업 발달과 함께했던 어살의 변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부는 상업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해산물 수요도 증가했고, 해산물을 원격지 운송에 적합한 방식으로 가공하기 시작했다. 칠산바다의 조기는 어선에서 소금에 절인 후에 장삿배에 실려 내륙지역으로 운반되었다.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명태는 말려서 북어라는 건어물 형태로 서해까지 유통되었다. 백두대간을 넘어 등짐으로 운반되는 경우도 많았다. 안동 간고등어는 동해안의 삼척이나 울진에서 절여서 사길령이나 십이령을 넘은 것이다.

판매망이 확보되면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서해안에서는 대나무 발 대신 그물을 치는 방식도 출현했다. ‘주벅’은 조기가 지나가는 길목에 기둥을 세우고 대형 그물을 펼쳐서 물고기를 잡는 어구를 말한다. 남동 해안에서는 어살과 비슷한 모양의 어구가 등장했고, 문헌 에서는 흔히 ‘경상도의 방렴’이라고 했다. 어살처럼 대나무 발을 펼치는 모양은 비슷했지만 거센 물살을 이기려면 더 견고한 방식으로 기둥을 세워야 했다.

바닥에 돌을 깔아서 기둥을 박을 수 있도록 하고, 기둥 밑동에는 무거운 돌을 매달아서 고정했다. 그런 후에도 칡 그물로 기둥을 서로 연결하고, 그 끝을 육지까지 연결하여 거친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했다. 물 위에 드러난 그 모양은 어살과 비슷하지만, 수면 아래 하부의 구조는 달랐던 것이다.
그물을 치는 어구도 등장한다. 남해안의 장살은 기둥을 세워서 그물이 떠내려가지 않게 했고, 줄살은 기둥 대신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서 그물을 고정했다. 주로 대구와 청어를 잡는 어구였다. 경상도의 방렴은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살’의 고장인 서해안까지 전파되었다. 정조 때에는 함경도로 전파되면서 휘리그물로 청어를 잡던 어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개항 이후에는 멸치를 잡는 죽방렴이 출현했다. 죽방렴은 남해군 지족해협처럼 조류의 흐름이 빠른 곳에 설치하는 까닭에 방렴보다 기둥을 더 단단하게 세워야 했다. 바닥에 3~4m 높이로 돌을 쌓고, 그 돌에 구멍을 뚫어서 참나무 기둥을 박아 놓는 것이다. 그러면 조류에 밀려온 토사가 바위 틈새를 메우면서 단단하게 고정된다. 요즘에는 죽방 렴을 보수할 때 크레인을 이용하고 참나무 대신에 철제 빔을 기둥으로 사용한다. 그 정도로 대규모의 시설인 것이다.

    전남 신안 증도의 만들 독살. 만들은 다양한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하여 가득할 만(滿)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변화 속에 사라진 어살 어법과 그 문화

조선시대에는 산림천택(山林川澤), 즉 산림과 하천이나 호수는 백성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이었다. 어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법전에도 빈민들이 어살을 3년 동안 경영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실제로는 여러 명목으로 권세가들이 어살을 전수받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종종 이를 환수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 설치 방법이 변하면서 빈민은 접근하기 어려운 사유재산이 되었다.
다만 돌을 쌓은 독살은 예전의 전통이 이어져 광복 후에도 마을에서 경영하는 사례가 있었다. 매년 독살의 보수작업을 함께 하고, 잡은 물고기도 나누었던 것이다.
한편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 습성과 이동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 독살은 바닷가의 산 부근에 많이 분포한다. 암초가 발달하여 풍랑을 막아주고, 물고기가 몰려드는 산그늘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주벅 등도 물고기의 이동로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어민들은 조금이라도 그 위치를 벗어나면 허탕을 친다고 한다.

그러나 개항 후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하면서 연안어업은 쇠퇴 하기 시작하였고, 정치망 어구도 그 형태가 변하고 다양화 하면서 옛 어살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체험 활동을 하는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독살이 있을 뿐이다.  오석민(지역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